[ 만리재에서 ] 2003년10월22일 제481호 

또 죄책감을…

초등학교 시절, 대학생인 외삼촌과 함께 산 적이 있다. 시골에서 올라와 누나 집 신세를 지게 된 외삼촌은 나와 한 방을 쓰며 공부도 가르쳐주고 친구처럼 놀아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외삼촌이 군에 입대하더니 맹호부대에 소속돼 베트남전에 파병됐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전쟁 하면 죽음을 떠올렸던 나는 외삼촌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외삼촌은 몇년 뒤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고, 이어 냉장고 크기만한 나무상자가 집으로 배달됐다. 상자에는 라디오, 카메라, 전기면도기, 통조림 등 미제 물건들이 수북이 담겨 있었고 어른들은 모여 앉아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덕분에 나는 바나나를 처음 맛보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고, 친구들에게 기관총 실탄을 몸에 두르고 권총을 찬 외삼촌의 사진을 보여주며 으쓱대기도 했다. 한동안 친구들과 어울려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가시는 곳 월남땅 하늘은 멀더라도…”를 부르며 전쟁놀이에 열을 올렸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사진/ 보도사진연감

그로부터 25년이 흐른 1995년 베트남 땅을 처음 밟았을 때, 오랜 전쟁의 후유증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는 베트남 사람들을 보면서 얼마나 안타깝던지…. 곳곳에 전쟁의 상흔이 그대로 남아 있고, 불구의 몸을 이끌고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거리에서 마주칠 때는 죄책감 때문에 시선을 피해야 했다. 문득 발길이 닿은 한 마을 어귀 군인묘지에는 수많은 주검들이 전쟁을 저주하며 누워 있었다. 1992년 한국과 베트남의 국교수립 이후 민·관 교류를 통해 과거를 씻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지만 이제 시작일 뿐, 아직도 산 넘어 산이다.

우리에게 베트남전이 아직 치유되지 않은 역사로 남아 있는 지금, 우리는 또 다른 전쟁터로 달려가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선언이 왜 나왔는지, 국정위기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를 되돌아볼 겨를도 없이 파병은 일파만파의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원인은 파병의 명분과 절차가 모두 흠집투성이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제 역할을 하기 위해 파병해야 한다는 명분은, 이라크전이 정당성 없는 전쟁이었음이 드러난 이상 설 땅을 잃은 지 오래다. 절차 또한 ‘진지한 논의’나 각계 의견의 수렴조차 없이 유엔 결의 직후 마치 기다렸다는 듯 서둘러 처리한 탓에 비판을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이라크 현지조사는 나라 망신을 시킬 정도로 허술하기 짝이 없더니, 파병 결정은 007영화처럼 오차 없이 신속하게 진행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우리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이 박수를 보내고 있고 일부 여론조사에서는 파병 찬성이 높게 나오고 있다. 혹시라도 노 대통령이 재신임 선언으로 노사모 등 지지세력을 결집시키고, 파병 결정으로 보수세력의 지지까지 얻어내려는 건 아닌지 의심하게 되는 이유다.

우리의 아이들이 커서 이라크를 찾았을 때 또다시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뿐이다.

한겨레21 편집장 배경록 pea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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