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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만리재에서 등록 2002.06.25(화) 제415호

[만리재에서] 아시아의 승리

잠시 가슴을 접고 시간여행을 해봅니다.

월드컵에 우리가 처음 나선 것이 1954년. 본선에 올라간 것은 그로부터 32년이 지난 86년입니다. 그 뒤로도 본선 진출은 몇 차례 했지만 한번도 이겨보지 못해 본선 첫승과 16강 진출은 숙원에서 비원이 됐습니다.

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한국팀은 여장을 풀자마자 헝가리와 맞섰는데, 결과는(타이기록은 있지만) 지금까지 깨지지 않은 0 대 9 대패였습니다. 20여일간 배와 비행기를 타고 쉴 겨를도 없이 출장해 여독으로 다리에 쥐가 난 선수들이 두세명씩 그라운드에 쓰러졌다고 합니다. 한국은 터키와의 2차전에서도 0 대 7로 완패했습니다.

당시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한국전쟁 휴전의 뒤처리를 둘러싼 국제회의가 열리고 있었는데, 전쟁에 시달린 불쌍한 선수들이라고 한국팀 숙소에는 초콜릿·양복 등 위문품이 답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팀은 돈이 바닥나 서둘러 귀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관중 입장료의 일정액을 출전국이 받는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입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본선에 연이어 진출하는 개가를 올렸지만 16강 진입에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월드컵에서는 16강을 훌쩍 넘어 우승까지 넘보게 됐으니 모두가 거리로 뛰쳐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해외동포들은 물론 휴전선의 북한 군인들도 같은 심정입니다.

한민족 외에 한국의 승승장구를 기뻐하고 응원하는 이들이 또 있습니다. 이웃 아시아 국가 사람들입니다. 인도네시아·파키스탄·말레이시아·베트남에서도 한국을 열렬히 응원한다고 합니다. 동남아와 아프리카에서 국내에 들어와 있는 이주노동자들도 붉은악마 못지않게 응원을 보내고 있습니다.

유럽과 남미의 잔치였던 월드컵이 문자 그대로 공처럼 둥글기를 바라는 보편적 바람이기 때문입니다. 인종주의가 아니라 서세동점으로 기운 지축을 바로잡고 싶은 염원입니다.

세네갈이 월드컵 개막전에서 식민지 종주국이자 1인당 국민소득이 수십배에 이르는 프랑스를 제쳤을 때 박수치고, 사우디아라비아가 독일의 골 세례를 막지 못하고 0 대 8로 무너질 때 안타까워한 우리의 심정과 같은 색깔일 것입니다.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 붉은악마가 ‘프라이드 오브 아시아’(Pride of Asia) 를 내세운 것은 맥을 참 잘 짚었습니다. 한국의 승리는 아시아의 승리입니다. 한국은 아시아의 자존심을 살렸습니다.

아시아의 따뜻한 박수는 월드컵에서 동네북이 돼온 약자의 염원 표출인 동시에 아시아에서 한국이 인심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좋은 이웃들의 축복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시아의 친구들, 특히 국내에 들어와 궂은 일을 마다 않는 이주노동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한겨레21 편집장 정영무 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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