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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만리재에서 등록 2002.05.02(목) 제407호

[만리재에서] 베트남, 평화의 맑은 샘

완만하면서 힘차게 솟은 산세, 끝없이 이어지는 아름다운 해변. ‘한-베 평화공원’이 들어서는 베트남의 푸옌성은 한국의 여느 해안 마을을 옮겨놓은 듯했습니다.

강인지 논인지 분간할 수 없는 습지와 밀림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총성을 부르는 전선 없는 공포의 전장이란 선입견은 푸옌성이 있는 중부지방에선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달구지를 끄는 소가 등에 혹이 난 물소라는 것과, 길 한쪽에서 벼가 자라고 다른 쪽에서는 추수를 하는 3모작 풍경을 빼면 이국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낯설지 않은 들녘이 전쟁에 대한 연상을 더욱 어렵게 했습니다. 동시에 전쟁에 대해 가졌던 일말의 불가피성을 가위눌렀습니다. 평화로운 우리네 농촌과 다를 게 없는 이곳에서 왜 우리 젊은이들이 생김새조차 구분하기 힘든 이들과 원수가 됐는가? 일찍이 한국전쟁의 비극을 겪은 우리가 무엇이 모자라서 이역만리에서 전쟁을 또 치렀는가?

우리 독자들이 푼푼이 모아준 성금을 들고 한국군 참전지역이자 대표적 민간인 학살지역인 이곳에 올 때만 해도 생각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베트남전은 우리가 흘린 피에 비해 너무 잊혀지고 배운 것이 너무 적은 전쟁이었습니다. <한겨레21>이 전쟁의 아픈 상처를 끄집어냈지만, 베트남전의 진실은 아직도 상당부분 기억의 전쟁 속에 갇혀 있습니다.

역사의 미래가 현재라면, 그리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억이 서로 다르다면 현재는 다른 기억을 둘러싼 사회적 투쟁의 장일 수밖에 없습니다. 베트남전쟁에 대한 기억들 사이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우리가 켜켜이 쌓인 의식의 퇴적층을 뚫고 도달한 지점에서 미소지으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국군을 이해한다, 그리고 증오심은 다 잊었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승자의 여유만은 아닙니다. 그들은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전쟁 그 자체를 극복하려고 무진 애를 써온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참전 작가인 반레는 말합니다. “전쟁은 상상을 초월해 개인의 삶과 마을을 파괴한다. 전쟁 이후의 세계는 인간이 향유할 수 있는 문화, 가치를 잃게 만든다.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라 전쟁이 가져다준 갈등을 치유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그에게 전쟁은 단지 너무 배가 고파 모든 사람이 먹고 옷 걸칠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싸운 것일 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한국의 참전군인들과 자리를 같이할 기회가 있을 때 하고픈 말을 마음으로 준비해왔다고 합니다. “이해한다. 이해할 수 있다. 전쟁은 인간의 품성을 잃게 한다. 당신들이 지고 있는 짐으로부터 빨리 벗어나기 바란다.”

꽝 푸옌성 서기장의 생각도 다르지 않습니다. 4월24일 ‘한-베 평화공원’ 기공식이 끝난 뒤 송바강변의 음식점에서 그는 처음 이런 얘기를 한다며 털어놓았습니다. “30년 전에 한국군을 보았다. 코앞에서도 보았다. 그러나 그때는 만날 수 없었는데 이제 우리가 이렇게 좋은 일로 만나서 이야기한다. 이런 날을 보는 게 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다. 내게 증오심은 이미 사라졌다. 하지만 우리도 한국 사람들처럼 화를 속까지 풀어야 다 풀리는데, 이제 속까지 다 풀었다.”

사람은 죄를 짓고 하늘은 용서한다고 합니다. 사람이 죄를 빌면 그것은 또한 하늘이 되겠지요. 평화공원은 비록 가로세로 100m의 작은 공원이지만, 사람과 사람이 하늘 아래서 만나는 자리입니다. 순수 민간성금으로 빚어진 의식의 맑은 샘입니다. 더없이 맑고 큰 우물입니다. 이런 공원은 21세기 처음입니다.

꽝 서기장은 “모두가 과거를 잊자고 하지만 평화공원 같은 이런 노력이 없다면 발전이나 미래가 없다”며 “특히 한국의 전후세대가 전쟁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놀랍다”고 감사했습니다.

한겨레21 편집장 정영무 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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