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섹션 : 만리재에서 등록 2001.09.26(수) 제378호

[만리재에서] 연고주의의 테러

세기적인 테러와 보복전쟁의 여파로 올 추석은 소연합니다. 보름의 정취를 편히 맛보지 못하고 전화(戰禍) 소식에 마음을 졸여야 하나요.

명절을 앞두고 하루하루가 정말 바늘방석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숫자는 몇명일 수도 있고 몇십명일 수도 있습니다. 적당히 덮이면 구사일생 화를 면할 수 있지만, 누군가가 입을 열거나 증빙이 발견되면 바로 지옥행입니다. ‘이용호 게이트’ 관련자들입니다.

연옥에 머무르고 있는 이들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테러를 감행했습니다. 선의의 투자자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국가 공조직에 구멍을 뻥 뚫었으며, 시민들의 가슴에 상처를 남겼습니다.

이 사회나 시민들이 이들에게 어떤 불이익이나 원한거리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이 저지른 테러는 아무런 이유도 명분도 없는 악질 테러입니다. 횡령·주가조작으로 돈을 모으고, 권력자에게 로비해 법망을 피하고 이득을 취하려 한, 고전적이고 첨단적인 기법이 모두 동원된 권력형 비리입니다.

이용호 게이트에 직간접적으로 어느 선까지 개입된 것인지, 수사는 제대로 되고 있는지 지금은 섣불리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언론이 비리를 추적하고 파헤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번의 경우 사주가 검찰에 구속된 몇몇 신문들이 ‘잘 걸렸다’며 춤을 추어 진상과 추측이 범벅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충격적입니다. 검찰총장의 동생에게 거액이 건네지고, 전직 법무장관이 큰돈을 받고 전화변론을 해주고, 이씨를 조사한 검사들이 그를 놓아주었습니다. 금융감독원과 국정원, 경찰 등 이른바 권력기관 사람들이 관계한 흔적도 있습니다.

여기에다 배후에 정권 실세라고 할 수 있는 정치권 인사들이 있으며 이들이 거액 로비를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김대중 정부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말해왔습니다. 민주주의는 법 앞의 평등이고 시장경제는 룰이 지켜지는 경쟁을 의미합니다. 고소고발 진정을 수십 차례 당하고 긴급체포까지 됐지만 풀려나고, 횡령 주가조작을 일삼아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일이 어떻게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서 가능한가요?

이용호 게이트는 연고주의의 산물입니다. 연고주의가 사적 이해관계를 넘어 국가 공조직을 무력화할 수도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역대정권이 해온 것처럼 현 정권도 전리품 챙기듯 요직인사에 자질보다 연고를 우선했으며, 그것은 곧 끼리끼리 해먹을 수 있는 멍석을 깔아준 셈입니다.

지금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연고주의라는 테러에 너무도 취약합니다. 특검제를 비롯한 진상규명 조처와 함께 법치주의를 좀먹는 연고주의에 대한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사람을 확 섞고 연고를 이용한 범죄는 가중처벌해서라도.

한겨레21 편집장 정영무 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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