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섹션 : 만리재에서 | 등록 2001.09.18(화) 제377호 |
[만리재에서] 테러의 씨앗 전쟁이 선포되고 최후통첩이 전달됐습니다. 이 글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아프가니스탄 또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등 몇 나라에 대한 미국의 공격이 시작될 수도 있습니다. 이른 새벽을 기해 전투기·전폭기가 새까맣게 뜨고, 미사일이 사방에서 수없이 발사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중무장한 특수부대나 지상군이 투입될지도 모릅니다.
10년 전 미국 중심 다국적군의 이라크 공격을 생중계한 전쟁이란 이름의 대량학살극이 또 일어나야 하는가, 그것을 쳐다볼 수밖에 없는가, 전후세대로서 짙은 전운을 처음 실감하면서 전에 없던 압박감과 무력감을 느낍니다. 안타깝게도 현재로선 빈 라덴이 테러를 주도했다는 결정적 증거가 제시되고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이 테러범 수사에 협조하는 ‘문명적 프로세스’가 이뤄질 가능성은 희박해보입니다. 뉴욕과 워싱턴에서 일어난 9·11 대참사는 그날 이후 ‘세계가 달라졌다’고 할 정도로 깊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어떤 정치적 명분도, 어떤 이유도, 민간 여객기를 납치해 시민들로 붐비는 건물에 돌진한 끔찍한 사건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되돌릴 수만 있다면 역사의 시계를 9월11일 이전으로 돌려놓고 싶은 게 대다수 인류의 바람일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원해도 한번 끊어진 생명, 파괴된 건물을 다시 되살릴 순 없습니다. 최선은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러려면 시계 바늘을 9월11일에만 맞출 것이 아니라 몇달 전 부시 정권의 출범, 그리고 최소한 최근 20년 전으로 돌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은 중동분쟁의 당사자인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지원했을 뿐 아니라, 자기 판단과 이해에 따라 레바논·리비아·이라크·이란·수단·아프가니스탄 등 여러 나라를 돌아가며 거의 쉴틈없이 공격해왔습니다.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은 “뉴욕의 아름다운 마천루가 사라졌다고 슬퍼하기 전에 미국에 의해 파괴된 팔레스타인과 레바논, 이라크의 아름다운 도시들을 기억하라”고 주장합니다. 미국은 테러의 씨앗을 많이 뿌렸으며, 테러리즘은 근본적으로 20세기적 억압과 불평등 구조에서 성장해왔습니다. 그러한 모순이 세계 최강국과 최빈국간의 ‘21세기 첫 전쟁’이란 한판승부로 해결되거나 사라지기 어렵다는 것은 자명해보입니다. 테러와 보복이라는 갈등의 에스컬레이션은 분단국가인 우리에게 특히 평화란 너무도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평화는 깨지기 쉬우며 이를 지키려는 인내와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한겨레21 편집장 정영무 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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