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도 그뒤 ] 2003년09월17일 제476호 

디지털 세상에서 중심잡기

[474호 표지이야기, 그 뒤]

처음 컴퓨터로 글을 써야 했던 것은 10년 전 대학시절이었다. 한 손에 볼펜을, 한 손에 수정액을 들고 종이에 눌러쓰는 리포트에 간신히 익숙해질 무렵, 이제는 꼭 컴퓨터로 쳐서 뽑아오라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교수님의 한마디에 학점 깎일까 두려워 손으로 원고를 다 쓴 다음, 다시 컴퓨터로 한자한자 ‘독수리 타법’으로 쳐내려갔다. 그것도 하숙집 선배의 컴퓨터를 빌려 온갖 눈치밥을 먹으면서. 그러다보면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한숨만 푹푹 나오곤 했다. 졸지에 컴퓨터와 자기 방을 빼앗긴 선배는 이 한심한 광경을 한 시간 정도 꾹 참아내다가 눈치밥의 수위를 한 단계 높인 뒤 아예 직접 쳐주기도 했다. (당시 취직을 한 선배는 나보다 실력이 나았고, 나는 은근히 그 순간을 기다렸다.) 그러던 내가 10년 만에 간사하게도 간단한 글조차 컴퓨터를 부팅시켜야만 써낼 수 있는 인간으로 ‘업그레이드’됐다.

표지기사 ‘안녕! 핸드라이팅’은 글쓰기를 통해 10년 만에 몰라보게 달라진 나와 우리의 모습을 한번 돌아보자는 그런 글이었다. 시인 안도현씨의 글 ‘저무는 육필의 시대를 떠올리며’처럼 떠나버린 육필의 시대를 추억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치는 글의 편리함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일 것이다. 독자들도 손글씨와 생각의 여유, 종이에 펜으로 정성스럽게 써내려가는 느낌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반응을 종이편지가 아닌 인터넷 게시판에 올려주었다.

꼭 손글씨에서 컴퓨터 글쓰기로의 변화뿐 아니더라도 지난 10년 동안 편리함의 이름으로 우리 곁에 온 온갖 기계들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비슷하게 복잡하다. 색깔과 소리와 기능으로 무장하고 계속 변신하는 최신 기종 휴대전화, 디지털 카메라, 이메일과 메신저, DVD와 MP3, PDF…. 가끔 이 기계들이 고장나 예정에 없던 수십만원의 지출을 할 때나, 바이러스 가득 묻은 이메일 때문에 고생할 때면 “내가 러다이트운동이라도 벌여서 기계 없는 세상에 인간적으로 여유 있게 살아야지” 하고 큰소리를 치지만, 어느새 더 좋은 신제품으로 바꾼 뒤에 흐뭇해하는 게 나다.

내가 디지털 세상을 거꾸로 돌려놓을 수는 없겠지만, 냉정하게 손익계산을 해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편리함 때문에 잃어버리는 것은 무엇이고, 그 중에서 포기할 수 없거나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너무나 정신없이 변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이런 중심잡기는 필요할 것 같다. 핸드라이팅은 나에게 그런 말을 남기며 떠나가고 있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




↑Back to the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