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hani.co.kr/h21

기사섹션 : 보도그뒤 등록 2003.08.14(목) 제472호

[보도그뒤] 내 딸아, 용서해 다오

[470호 표지이야기, 그 뒤]

“삼복 더위에 독자들 짜증나게 할 일 있냐?” 빈곤 문제를 표지이야기로 다루자는 얘기가 나왔을 때, 이런 반응을 보인 <한겨레21> 기자가 몇명 있었다(그들의 명예(?)를 위해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겠다). 무작정 속세를 떠나고 싶은 휴가철에 속세의 고민거리를 표지에 담은 잡지가 과연 독자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겠느냐는 게 그들의 논리였다. ‘시장 논리에 너무 매몰된 게 아니냐’고 비난한다면, 그 비난을 달게 받을 수밖에 없는 게 오늘날 <한겨레21>이 처한 현실이다.

빈곤 문제는 정말 ‘짜증나는’ 아이템이었다. 특히 ‘하늘과 땅 사이’만큼이나 큰 빈부격차가 그랬다. 생계에 위협을 느끼는 아이들과 ‘한국형 귀족’으로 자라는 아이들이 공존하는 이 시기를 역사가들은 ‘신봉건사회’로 명명할지 모를 일이다.

‘귀족의 세계’를 취재하는 일은 경력 9년차인 기자에게도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니었다. 무슨 놈의 ‘영업비밀’이 그렇게도 많은지, 이른바 명품만을 취급한다는 상점들은 공식적인 취재가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사기(?)를 쳤다. 해외 스포츠 캠프를 운영하는 서울 강남의 ㅅ사에 학부모처럼 ‘분장’하고 상담을 받으러 갔다. 그러나 ㅅ사 직원들은 ‘전문가’였다. “보통 어머님들이 많이 오시는데… 참 이상하군요.” 그들이 경계의 수준을 ‘데프콘3’으로 높이려는 순간 나는 내 딸을 팔고 말았다. “사실은 제 딸이 유치원생인데 지나치게 내성적이라 걱정이 돼서 제가 직접 왔어요. 애 엄마는 좀 바쁘고….” “혹시 따님이 자폐증인가요?”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닙니다만, 좀 비슷한 증세라….” “아하, 그러셨군요. 죄송합니다. 저희는 혹시 경쟁업체에서 파견한 ‘스파이’ 아닌가 의심했습니다. 요즘 경쟁업체들이 많이 생겨서 보안 유지에 신경을 쓰고 있거든요.”

21개월 된 딸까지 동원한 취재는 대성공이었다. 이 글을 빌려 내 딸과 ㅅ사 직원들께 사과드린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http://www.hani.co.kr/section-021025000/2003/08/021025000200308140472013.html



The Hankyoreh Plus copyright(c) webmaster@new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