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그뒤] '꽃을 든 괴물' 어떻게 볼 것인가

319호 ‘황석영, 동인문학상 거부파문’

고종석과 정과리의 논쟁- <조선일보> 문화권력을 보는 두 가지 시각

소설가 황석영씨의 동인문학상 후보 거부 파문 이후 <조선일보>의 문화권력화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한겨레21>은 319호 표지이야기에 이어 문단과 한국 지식인 사회에 불붙은 이 논쟁을 조명하는 대담을 마련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고종석(41·한국일보 편집위원)씨는 지속적으로 <조선일보>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써왔고, 문학평론가 정과리(42·충남대 교수)씨는 최근 문학과 지성사 홈페이지의 문지마당에 장문의 글을 올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으로서 황씨의 거부 파문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다. 젊은 문학평론가와 문학담당기자로 90년 문학평론가 김현씨의 장례식에서 처음 만난 이들은 스스럼없이 말을 놓는 문단의 동료이자 친구사이이기도 하다. 그만큼 서로에게는 어색하고 불편한 논쟁의 자리이기도 했다. 목소리가 높아지거나 얼굴이 붉어지지는 않았지만 두 시간 동안 진행된 이들의 대담은 거대언론 권력을 중심으로 팽팽하게 긴장하는 지식인 사회의 한 표정을 볼 수 있는 자리였다. 편집자

정과리:<한겨레21>에서 동인문학상 심사위원단이 문단의 파벌 위주로 안배됐다고 비판한 건 지나친 억측이다. 기사 가운데 ‘공쿠르상을 비롯한 서양의 권위있는 문학상의 종신심사위원은 사계에서 부동의 권위를 인정받은 인사들로 구성된다’라고 했는데 나를 제외한 심사위원들은 우리나라 문단에서 권위를 인정받은 사람들이다.

고종석:주관사인 조선일보와 분리해서 생각한다면 동인문학상 제도가 이런 식으로 바뀐 것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심사위원들이 모두 최량의 문인들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쪽의 판단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종신직도 가능하다고 본다. 특히 후보작을 단편, 중편에서 장편과 단행본 대상으로 확대한 것은 바람직하게 생각한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조선일보와 관련돼 있다는 것이 개운치 않다는 거다.

공쿠르상과 동인문학상

정과리:동인문학상 기획자가 공쿠르상 장점을 가져오려고 했다. 크게 두 가지다. 심사과정 공개를 통해 사적이해 관계에서 벗어난 심사의 투명성을 보장하고 종신심사위원제 도입으로 심사위원들에게 책임을 강하게 부여하기로 했다. 이렇게 선정되는 상은 상의 권위에 값하는 작품이 선정되지 않을 경우 비난을 들을 수밖에 없다. 물론 단점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시상 제도 자체를 비판하는 글은 못봤다.

고종석:공쿠르상 역시 몇몇 메이저 출판사에서 나눠먹는다는 비판을 받는 등 추한 이면이 있다. 그러나 특정매체, 조선일보처럼 바람직하지 못한 정치적 지향을 가진 매체가 독점 운영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동인문학상의 경우 황석영씨가 글에서 ‘줄 세우기’라고 표현했듯이 문단에 대한 조선일보의 영향력이 크게 강화하는 영향을 가져올 거라는 예측은 가능하다. 조선일보가 의도하든 하지 않든 말이다.

정과리:왜 그렇게 생각하나.

고종석:일단 종신심사위원 문제를 들 수 있다. 나는 이와 관련해서 ‘불사의 플레이야드’라는 말을 썼는데, 이 양반들은 죽을 때까지 조선일보에 종신 협력자가 되는 것 아닌가. 이들이 조선일보의 방향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반대의견을 표명하기 어렵다는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문단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작가의 입장에서 보면 여태까지 <조선일보> 문화부 눈밖에 나는 것도 부담스러웠지만 이제 그것에 더해서 플레이야드들이 떠받쳐 주니 눈치를 안 볼 수 없다. 동인문학상을 받을 가능성이 없는 문인이라도 모두 선후배로 통하는 한국 문단에서 그들과의 사적 인연을 끊기도 힘들다. <조선일보> 문화부 혼자서 꿈꾸던 문학 또는 문화의 지배(?)욕구가 7명의 원군을 얻은 셈이고 또 이들이 다 일당 백의 파워를 가지고 있다. 황석영씨의 거부 이후 분위기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이제 <조선일보>에 글쓰지 않기는 어렵게 됐다.

정과리: 조선일보가 한국 문학을 쥐락펴락하려는 노력을 해왔나. 어디서 그런 증거들을 발견할 수 있을까.

고종석:그 자체로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지만 신문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본다.

정과리:그건 어떤 신문이나 마찬가지다. 독자들을 유인하는 방법으로 좋은 문화면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한국 문단을 지배하기 위한 노력과 동일하게 놓을 수는 없다.

고종석:동일하지는 않지만 겹치는 부분이 많이 있다. 한국 문단이 언론에 많이 종속돼 있다는 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주요 일간지 출판 면의 신간 서평 하나도 큰 위력을 가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문인들 역시 언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조선일보> 기고에 대한 생각

정과리:그게 사실이더라도 조선일보 자체에서 문단에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지배할 의도를 가질 이유는 없다. 실제로 문인들이 <조선일보>에 기고한다고 해서 그 신문이 문학권력으로 크는 데 도움되는 건 아니다.

고종석:아니, 도움이 된다. 모든 신문처럼 조선일보 역시 자기확장의 욕망이 있고 문화권력에 대한 욕구가 있다. 또는 문학권력의 파트론이 되고 싶어하는 의지가 있다.

정과리:문학권력의 파트론이 된다는 건 권력의 파트론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문학적 입장이 다양한 사람들을 모아놓고 어떻게 파트론을 할 수 있겠나.

고종석:문학과 지성사 같은 출판사는 지향점이나 상대적인 이념적 순수성이 있지만 일간지 문화면에서 이념적 순수성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힘의 확장이다. 어떤 이념이건 힘의 확장에 기여할 수 있으면 그것은 정치면이나 사설의 정치적 입장을 치장하거나 적어도 은폐하는 데 기여한다.

정과리:문학이나 문화면의 뛰어난 점이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치장해준다고 했는데, 오히려 동인문학상 제도의 변화에는 장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출판사에서 이 제도를 떠맡으면 문학적 이념이나 유파의 압력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문학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일간지에서 주관함으로써 그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고종석:정씨는 평론가니까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유파의 압력에서 자유롭다는 장점은 조선일보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는 것에 비하면 지극히 미미하다.

정과리:내가 문학하는 사람이고 우리나라의 다른 문학상에서 안 좋은 관행이 많아서 그런 부분에 신경쓰는 건지도 모르겠다. 고씨는 동인문학상이 권위를 가질수록 조선의 정치적 이념을 치장하거나 적어도 은폐하는 데 기능하게 될 거라고 이야기하지만 동인문학상은 문학인들의 축제에 불과하다. 그 자체가 사회적 힘을 얼마나 발휘할 수 있겠는가

고종석:결정적으로 도와주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앞으로 동인문학상 수상작이 조선의 정치이념을 따라가지도 않을 것이라고 믿지만 조선일보에 반대되는 세계관을 보여주는 작품이건, 순수문학이건 그 자체로 조선의 헤게모니를 강화한다. 문화면에 썼던 좌파 이론가나 작가들의 진보적인 글이 그랬듯이. 정씨가 문지사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표현한 대로 ‘괴물이 든 꽃’이 괴물의 추악함을 두드러지게 하는 게 아니라 괴물의 추악함을 희석시킬 수 있다. 그리고 조선일보는 동인문학상을 통해서 이데올로기 공세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인사관리를 하는 것이다. 조선의 문화면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중 상당 부분이 외부필자를 잘 활용하는 점이다. 동인문학상도 관리라는 측면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은가.

한국사회에서의 이념의 공존

정과리:그렇다면 조선의 정치적 노선이나 이념과 관계해서 어떤 기능이 있을까? 문학과 언론은 별개다. 고씨의 말처럼 밀접하게 관련있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정치적 노선에 타격을 줄 것이다. 시상제도 자체는 단기적으로 <조선일보> 권위를 높일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수상 작품의 권위가 획득된다면 사람들은 <조선일보>가 아닌 작품의 세계관에 감화받을 것이다. 노벨문학상의 예를 들어보자. 서구 유럽에서 독점하다시피했던 이 상이 60년대부터 제3세계에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서유럽의 지배적인 문학적 경향에 반대되는 다른 문학적 경향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됐다. 남미쪽 첫 수상자인 마르케스의 작품을 통해 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고 이는 80∼90년대 전세계 문학을 휩쓸었다.

고종석:그렇다고 서구 문학의 지배에 흠집을 냈나?

정과리:그렇지는 않았지만 제3세계 문학이 서구 문학과 동등한 자리에 올려졌다. 오늘날 서구문학은 지쳤는 데 비해 남미문학은 활력이 있고 많은 독자들이 빨려들어가 있다. 궁극적 영향력을 생각하면 노벨문학상을 거부하기보다 수상함으로써 노벨문학상이 원래 갖고 있던 이념적 기반, 즉 순수관념주의를 약화시키고 다른 문학적 경향을 퍼뜨리는 기반이 됐다.

고종석:동인문학상의 수상작이 얼마나 팔릴까? 많이 나가면 한 200만부 나갈 수 있겠지. <조선일보> 부수는 300만을 넘는다. 문화면에서는 종종 마르크스나 게바라 만세를 부르는 기사가 나온다. 이를 읽는 300만명 또는 그 이상의 독자들이 기사에 감화받아서 <조선일보>에 적개심을 가지게 될까?

정과리:<조선일보>가 아니라 <조선일보>가 표방한다고 생각되는 정치적 이념을 약화하는 데는 기능한다. 궁극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일보>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고 봐줘야 한다.

고종석:안티조선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표현하는 ‘조선일보 제몫찾아주기’라는 말이 그다지 적절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조선일보>는 명백한 극우신문이다. 물론 모든 이들이 가지고 있는 극우적 욕망을 드러낼 매체도 필요하다는 차원에서 극우신문은 가치가 있다. 그런데 <조선일보>의 자리는 그 이상이다. 극우적 이념이 박멸해야 할 것은 아니겠지만 전염을 막기 위한 노력은 필요한 거라고 생각한다.

정과리:극우적 이데올로기가 있다고 해도 전염적 힘을 많이 잃어가고 있다. 사회 전체적으로도 박정희 정권 이래로 길러진 파시즘적 이데올로기가 표면적으로는 약화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념이 있어야 한다 없어야 한다가 아니라 다양한 이념들이 공존하면서 비교적 공정하고 진보적, 개방적인 이념이 반대편을 압도하고 그리고 대화하면 그것이 가장 좋은 상황이다.

고종석:프랑스의 경우, 온건 우익, 사회당, 약화된 공산당, 녹색당. 트로츠키파, 국민전선 극우파가 다 있다. 실제적으로 공산당이나 트로츠키파, 국민전선은 사회당이나 온건 우익에 비하면 힘이 약하다. 그들은 국민의 좌절된 욕망을 풀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똑같지는 않더라도 국민전선 스타일의 극단적 우익 이데올로기가 너무 강하다. 나는 그 이데올로기의 지분을 최소한 프랑스의 국민전선 수준으로 낮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선일보>는 극우인가? 아닌가?

정과리:조선일보를 깬다고 우익이 없어질까.

고종석: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우익 이데올로기의 가장 큰 산실이다.

정과리:본말이 전도된 이야기다. 사람들이 <조선일보>를 선택한 거지. <조선일보>가 독자를 선택한 건 아니다. 보수 우익 이데올로기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은 <조선일보>가 아니라 학교기구나 관리기구에 있고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다. <조선일보>는 그런 성향을 두드러지게 표현할 뿐이다.

고종석:<조선일보>는 표현하면서 우리 사회에 미만해 있는 그런 성향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정과리:나는 <조선일보>가 극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보수우익신문일 뿐이고 조갑제의 극렬한 발언은 <조선일보>가 처해 있는 위기의 표현에 불과하다. 문학인이라는 입장 때문이라도 그렇게 생각 못한다. 사람은 변하기 위해서 산다. 성향이나 사건을 비판할 수 있어도 사건의 대리인이 되는 사람을 비판하는 건 옳지 않다. 왜냐면 대리인이 변화될 가능성을 염두해야 하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비판도 그런 의미에서 이뤄져야 한다.

고종석:물론 대리인만 비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비판의 중심이 되어야하는 구조도 그 대리인들이 모여서 만드는 것이다. 구조를 바꿔가는 것도 하나하나의 대리인들이다. 따라서 양쪽을 동시에 비판해나가야 한다.

정과리:몰리에르는 ‘문학이란 삶의 본성을 보는 일’이라고 말했다. 왕의 총애를 받던 몰리에르가 떠오르는 시민계급의 공격에 시달리면서 ‘나한테서 모든 것을 빼앗어가도 삶의 본질(nature)을 읽는 행위만은 못 뺏어갈 것’이라고 이야기했는데 그런 게 문학이다. 몰리에르는 왕에게 복무했지만 궁극적으로 절대왕권을 해체하는 데 기여했고 후세에게는 시민계급의 옹호자로 읽혀진다.

고종석:긴 지평에서 보면 동인문학상 수상작들이 <조선일보>의 이념을 해체하는 데 기여할 수 도 있다. 그러나 당대에서는 조선이 표방하는 이념을 강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 정씨는 너무 긴 지평, 근본적인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것, 현실적인 것에 눈을 감는 것 아닐까?

정과리:동인문학상이 그런 데라도 기여할 수 있다면 그걸 도와주어야 할 것 아닌가. 정치적으로 반대되는 작품이 아니라 순문학이라도 그런 기여를 할 수 있다. 순문학은 그 자체로 정치적 편향성을 반성케 하는 힘이 있다.

고종석:궁극적이고 긴 지평에서 그런 걸 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 당대에서는 조선일보의 이념과 싸우는 이들의 환경을 불리하게 만드는 게 문제라는 거다.

정과리:조선일보와의 싸움이라는 게 전망을 상실한 한국 지식인의 정신적 공황이 만들어 놓은 분위기지 그 자체가 의미있는 일인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전망을 상실한 사람들은 대부분 마르크시스트들이다.

안티조선, 그리고 선과 악

고종석: 정씨는 글에서 ‘거죽뿐인 전망을 거듭 강조하면서 속으로는 문화산업 속으로 적극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라고 썼는데 이 사람들은 구좌파들, 특히 강단좌파들에 대한 정확한 표현이지만 안티조선에 해당하는 말은 아니다.

정과리:안티조선 역시 구좌파의 산물이다.

고종석:안티조선일보 운동의 방법론에 있어서는 일정 정도 문제가 있다는 걸 인정하지만 지지할 수밖에 없는 건 그들에게는 최소한의 철학이 있다. 유토피아적 전망은 없지만 조선일보로 상징되는 우리 안의 악, 지금의 악을 최소화하자는 거다. 그리고 선을 최대화하자는 유토피아주의주의는 구좌파 논리일 뿐이다.

정과리:악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선을 실천하는 수밖에 없다. 악과 같은 방식으로 악을 공격하면 악을 계속 변형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악을 공격할 때도 선의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철저히 죽이는 방법 외에는 없다. 죽인 다음에는 아무런 대가도 없이 소멸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변화시키는 게 최선의 방식이고 상대방을 존중해야지만 변화가 생긴다. 그게 악에 대해서 선의 방식으로 접근하는 방법이다

고종석:<조선일보>는 자기와 의견이 다른 이들을 존중하지 않는다. 북한을 주적으로 설정하고 자신과 다르면 다 빨갱이로 몬다. 고문받은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간첩이라는 사실만 중요해서 간첩은 고문받아도 괜찮다는 논리인데. 이런 <조선일보>를 존중하고 같이 변화하기 노력해야 하나. 그리고 안티조선운동은 좌우의 싸움이 아니라 유사파시즘에 대항하는 민주주의자들의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정과리:지금의 <조선일보>가 북한과의 교류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나가는 부분은 지식인 사회에서 상당히 비판받는다. 같은 언론에서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 사회가 아주 서서히 독재정권의 그늘로부터 벗어나고 있다. 이것은 <조선일보> 역시 거역할 수 없는 추세일 거고.

고종석:그렇지만 국가보안법처럼 인간의 기본권인 사상의 자유를 제약하는 말도 안 되는 법이 시퍼렇게 살아 있다. 이 법은 형식적인 민주주의만 존재하는 나라라도 수치스러워해야 할 법이다. 조선일보는 이 법의 강력한 지원자다.

정과리:국가보안법을 철폐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의 진보를 가리키는 척도 아닌가. 그리고 그 싸움은 조선일보를 표적으로 할 것이 아니다.

고종석:중요한 표적으로 삼아야 한다. 왜냐면 국가보안법을 유지시켜야 하는 논리를 정치인들이 얼마나 떠들어대건 언론에서 전달해주지 않으면 국민들은 모르기 때문이다. 유지시켜야 한다는 여론은 결국 <조선일보>에서 만들어내는 것 아닌가

정과리:한겨레를 제외한 모든 언론이 그렇다고 봐야 한다.

고종석: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게 <조선일보> 논리다.

정과리:<조선일보>를 비판한다고 해서 그 문제가 해결 될 수 있을까?

고종석:언론은 사회의 거울인 동시에 원동기다. 여론을 반영하는 듯하면서 계속 만들어낸다. <조선일보>가 그런 여론을 실제보다 강화하고 재생산해낸다.

정면돌파인가, 외곽 무너뜨리기인가

정과리:이렇게 정리해보자. 상당수 언론은 낡은 이데로올기에 집착하는데 조선일보가 그들을 대표한다. 보수 이념지를 확실히 표방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고. 그렇다고 해서 조선일보를 집중적으로 공격한다고 한국사회의 내면에 깔린 보수 이데올로기가 약화될 수 있을까

고종석:속된 말로 조선일보가 주공방향이 되는 거다. 조선일보가 사라진다고 극우보수주의가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조선이 사령부이자 산실이라는 측면에서 그 파괴력은 막강한 것이다.

정과리:축구에서 골을 향해 가는 전술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정면돌파와 외곽 무너뜨리기인데 후자가 일반적인 축구의 전술이다. 정면 돌파 시도한 팀치고 월드컵에서 우승한 팀이 없다. 외곽을 무너뜨리는 건 전체의 균형을 붕괴시키는 것이다. 외곽은 우리 자신의 자리이기도 하다. 즉 우리가 실천해나가야 하는 건 우리 삶 전반을 각자가 맡은 자리에서 조금씩 바꿔나가는 거라고 본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세상을 바꿔가는 것이다. 가령 정면 돌파를 할 때는 뚫고 나가자면 들어가는 문을 꽉 막고 있고 오히려 적들이 외곽을 통해서 기습작전을 편다. 절대 정면돌파로 중앙은 문너지지 않는다.

고종석:무너뜨리지는 않더라도 약화시킬 수는 있겠지. 지금 안티조선일보 운동의 싸움이 정면돌파라면 외곽돌파는 어떤 걸까?

정과리:그 중 대표적인 게 동인문학상이다. 작품을 통해 조선일보에 반하는 생각을 갖게끔 해줄 수 있고, 조선일보사에서 주관하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다.

고종석:정씨가 세상과 싸우려면 세상 안에서 싸워야 한다고 말하는 데는 동의하다. 그러나 조선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다. 조선 바깥에도 세상이 많이 있다. 나라면 조선의 바깥 세상에서 싸우는 게 더 효율적이고 아름다워 보인다.

정과리:언제든지 사람들은 만나야 하고 그래야 사람은 바뀔 수 있다. 안티조선일보 운동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다른 방식을 선택하는 사람들에게 폭언을 하면서 비난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 대화에 응해야 할 까닭이 없어진다. 비판은 상대를 존중하는 데서 출발해야 하고 자신과 상대방이 동격으로 놓여 있는 자리에서 대화해야 한다. 오늘날 그렇지 못한 분위기가 한국사회에 퍼져 있는 건 안타깝다.

고종석:공감한다. 다만 거친 비판이 올 때 보기조차 싫어지는 게 인지상정이기는 하지만 약간만 분을 누르고 어떤 비판이 있나 살펴본다면 거친 거죽 안에 합리적이고 부드러운 비판을 발견 할 수 있지 않을까. 또는 성찰의 계기를 만들 수 있는 비판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정리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