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학 ] 2003년12월10일 제488호 

[사이언스크로키] 날로 새로운 현실

[고중숙의 사이언스 크로키]

언제부터인가 컴퓨터의 발달과 함께 가상현실의 물결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다. 그 흐름이 우리의 머리 속을 파고듦에 따라 “가상현실의 관념을 극한까지 추구해보면 어떤 현상이 펼쳐질까?”하는 의문이 이어진다. 최근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킨 <매트릭스>란 영화는 오늘날의 영상 기술을 최대한 발휘해서 나름의 해답을 제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가상현실이란 관념의 뿌리는 사실 매우 오래되었다고 봐야 한다.


일러스트레이션 | 유은주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은 동양적 가상현실의 원조 격이다. 어느 날 꿈속에서 나비가 된 장자는 아름다운 꽃밭을 노닐며 즐거움을 만끽한다. 그런데 문득 잠을 깨보니 자신은 나비가 아니라 장자였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장자로서의 자신은 나비의 꿈이 아닐까 언제 되새겨봐도 신비감이 샘솟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이대로 묻혀질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뒤를 이어 남가일몽(南柯一夢)의 고사, 이광수의 <꿈> 등 시대를 달리하면서 가상현실은 계속 새로운 모습으로 되풀이되어 출현했다.

서양의 가장 유명한 예는 역시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라고 할 것이다. 그는 이른바 ‘동굴의 비유’를 들어 이데아론을 이야기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보는 현실은 외부의 사물이 동굴의 벽에 투영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날 때부터 동굴에 갇혀 오직 그림자만 보도록 묶여 있다면 다른 증거가 없는 한 그림자를 현실로 인정할 것이다. 플라톤은 인간의 감성이 바로 동굴을 형성하며, 동굴 밖에 있는 진정한 현실로서의 이데아를 인식하려면 이성의 눈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이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그를 최초의 관념주의자로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플라톤의 관점은 근세에 들어 본격적인 관념주의를 내세운 칸트에 의해 계승되었다. 칸트는 철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과학자로 봐도 좋다. 뉴턴 역학에 매료된 그는 자연과학 분야의 논문을 다수 펴냈고 태양계의 기원에 관한 ‘칸트-라플라스 성운설’을 제시했다. 또한 그는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절대적 진리의 표상으로 보았다. 이 기하학은 몇 가지의 근본 개념과 공리로 구성되며 인간적 현실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다시 말해 이 체계는 자체로서 완전하고 영원불멸이다. 따라서 그것을 파악하는 데는 어떤 경험도 필요 없고 타고난 선험적 이성으로 족하다.

그런데 나중에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나와 이런 생각을 깨뜨렸다. 기하학의 공리는 절대명제가 아니며 인간의 선택에 따라 꾸며지는 것일 뿐이란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제 유클리드 기하학은 무수히 다양한 기하학 가운데 하나인 상대적 진리에 지나지 않는다. 공간의 휘어짐을 확증한 일반상대성이론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실체적 근거이기도 하다. 이로써 신비로웠던 유클리드적 가상현실은 더욱 심오한 현실의 깊이에 머리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맥락에서 물밀듯 다가오는 가상현실의 미래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언젠가 가상현실이 실제 현실을 대체할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한다. 또는 갈수록 두 현실이 가까워져 마침내 서로 일치하는 때가 오리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의 깊이는 그런 예상을 훨씬 뛰어넘을 것으로 여겨진다. 놀라운 가상현실의 발전은 오직 날로 새로워지는 현실을 드러내줄 보조적 현실일 뿐이다.

고중숙 | 순천대학교 교수 · 이론화학 jsg@suncho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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