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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과학 | 등록 2003.10.23(목) 제48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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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사이언스크로키] 천의 얼굴, 우주계획 1961년 5월25일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국가의 긴급과제와 현상에 관한 특별 교서’를 발표했다. 여기에는 “60년대가 끝날 때까지 인간을 달에 착륙시켰다가 안전하게 지구로 귀환시키겠다”는 아폴로계획이 담겨 있었다. 이는 1957년 10월4일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를 발사함으로써 촉발된 미-소간 우주개발 경쟁에서 결정적 승리를 선취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우연찮게도 스푸트니크는 러시아어로 ‘동반자’라는 뜻이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이미 적수로서의 동반자를 이끌고 다닐 운명을 드러내는 듯하다. 스푸트니크의 발사 성공은 소련인들에게는 엄청난 자부심, 반대로 미국인들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충격을 주었다. 당시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는 ‘국제지구물리학의 해’라는 학회가 열리고 있었다. 거기에는 세계 각국의 과학자들은 물론 냉전시대의 학회로서는 드물게 소련의 과학자들도 많이 참석했다. 그런데 월요일부터 열린 이 학회가 금요일 저녁의 파티를 끝으로 마무리될 무렵 이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파티가 끝날 때까지 스푸트니크는 그들의 머리 위를 두 차례나 더 지나갔다. 어떤 사람은 이를 ‘제2의 진주만 습격’이라고 불렀다. 아니나 다를까, ‘제1의 진주만 습격’ 이후에 그랬듯 미국에는 맹목에 가까운 국수주의가 고개를 들었다(이런 점에서 9·11 사태는 ‘제3의 진주만 습격’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1958년 10월1일에는 우주센터의 대명사격인 미 항공우주국(NASA)이 설립되었고, 이후 말 그대로 천문학적 비용을 쏟아부으며 소련을 추격했다. 이 과정에서 우주개발은 ‘천의 얼굴’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물론 가장 전면에 내세워지는 것은 거의 언제나 ‘과학발전을 통한 인류문명에의 기여’라고나 할 순수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정치·경제·군사 부문을 비롯해 일일이 열거하기 힘든 수많은 가면들이 준비돼 있었다. 어쨌거나 이런 추세에 힘입어 70년대 초까지 우주과학은 절정의 황금기를 구가했다. 1969년 7월20일 달에 착륙한 최초의 인간 닐 암스트롱은 달 표면에 첫발을 딛는 순간 “이것은 한 사람의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를 위한 거보다”라는 말을 남겨 우주과학의 앞날에 펼쳐질 끝없는 영광에 대한 자신감을 피력했다. 아마도 인류 역사상 과학자들의 연구활동에 대해 이토록 전체 사회의 총체적 지지가 이루어진 적은 다시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로니컬하게도 암스트롱의 첫걸음은 바로 퇴조의 전주곡이었다. 애초 순수한 과학적 동기에서 시작된 계획이 아닌 만큼 일단 바라던 선전적 목표가 달성되자마자 추진력은 급격히 감퇴했다. 2차대전 뒤 세계의 과학은 입자물리학과 우주과학으로 대표되는 ‘거대 과학’(big science)의 시대였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과학은 실용적 경향을 강하게 띠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전자·생명·정보 등 비교적 작은 규모로도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분야가 각광받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중국의 유인 우주선 발사 계획은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이번 성공을 바탕으로 중국은 우주정거장 건설, 달 착륙, 화성탐사 계획 등을 추진하리라고 한다. 그러나 중국의 여러 상황을 생각할 때 이런 계획이 ‘스포츠 과학’의 수준을 넘어 진지한 노력으로 이어질지는 더 지켜볼 필요가 있겠다.
고중숙 | 순천대학교 교수·이론화학 jsg@suncho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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