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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과학 | 등록 2003.01.02(목) 제44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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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중숙의 사이언스 크로키] 가치중립적 과학은 존재하나 고중숙의 사이언스 크로키 20세기 말부터 유령처럼 떠돌던 ‘복제인간’의 관념이 어쩌면 ‘육신’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캐나다의 비정통적 종교단체 ‘라엘리언’은 인류가 외계인의 복제에 의해 출현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스스로 복제인간을 탄생시키겠다고 공언해왔다. 그들은 이를 위해 1997년에 ‘클로네이드’란 회사를 차렸다. 그리고 새해가 턱밑에 닥친 시점에 또다시 올해 안에 최초의 복제인간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고했다. 이탈리아의 한 의사도 내년 1월께 자신의 실험에 따른 복제인간이 태어난다고 발표했다. 국제 사회는 여태껏도 인간의 복제를 두고 수많은 토론을 벌여왔다. 하지만 정작 그 출현을 목격하면 다시금 과학을 중심으로 윤리·종교·철학·법학 등을 아우르는 거센 논쟁에 휘말릴 것으로 예상된다. 논쟁과 관련된 논점은 많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핵심은 역시 “과학은 과연 가치중립적인가”라는 의문인 듯하다. 그 대표적 예로는 ‘원자력’을 자주 든다. 원자력의 위력은 막강하다. 1907년 아인슈타인은 유명한 E=mc2란 식으로 그 가능성을 예언했다. 이후 갖은 곡절을 거쳐 1945년에는 원자폭탄의 형태로 위력을 뿜으면서 2차대전을 마무리했다. 이 동안 원자력이라는 ‘요술램프 속의 괴물’을 해방하는 데 얽힌 얘기는 어떤 판타지 소설 못지않게 드라마틱하다. 다만 마지막 클라이맥스가 비극적이어서 아쉬울 따름이다. 그 뒤로도 비극적 요소는 제거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전쟁무기와 평화적 이용이라는 두 얼굴을 내비치며 많은 갈등을 일으켰다. 이제 복제인간의 문제가 원자력의 자리를 대신하려 든다. 정확히 내다보기는 어렵지만 그 파장이 원자력보다 더욱 클지 모른다. 이 때문에 생명공학의 미래를 암울하게 보는 시각도 많다. 그리하여 이른바 ‘과학의 가치중립성’ 더 나아가 ‘과학자의 가치중립적 연구 태도’에 대해 은근한 비난이 깔린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그런데 우리는 이쯤에서 시야를 좀더 넓혀볼 필요가 있다. 이 논제에서의 과학은 보통 ‘자연과학’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래야 할 이유는 아무 데도 없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라는 ‘사회과학’적 제도를 보자. 흔히 민주주의를 인간이 찾아낸 궁극의 정치제도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가치중립적 요소가 있다. 따라서 유용성이 뛰어난 만큼 위험성도 크며, 독일의 바이마르공화국을 무너뜨린 히틀러의 나치즘이 이를 증명했다. 음악·미술과 같은 ‘미학’ 분야도 마찬가지다. 가락과 화음, 형상과 색상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다. 오직 인간적 관점과 결부될 때만 ‘미학적 가치’가 드러난다. 이 논지는 더 나아가 윤리·종교·철학 등에까지 예외 없이 적용된다. 사실 위 논제는 대입 논술고사를 비롯한 수많은 토론의 주제로 꼽혀왔다. 그리고 거의 모든 이들은 “과학도 역시 가치의존적이다”란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위 얘기에 비춰볼 때 여기에는 “인간 상황과 결부될 때”라는 단서를 붙여야 한다. 그런데 인간이 다루는 것치고 인간과 무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시 말해 본질적으로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문과학적 활동’이며 모든 과학은 인문과학이다. 그러므로 논의는 이 기회에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단순히 자연과학에 머물 게 아니라 총체적인 새 가치체계를 모색해야 한다. 순천대학교 교수·이론화학 jsg@sunchon.suncho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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