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학 ] 2000년11월01일 제332호 

[과학] 피임과 낙태의 딜레마

강건일의 과학읽기

일반적인 의미에서 약을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해 주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피임약은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피임약은 하느님이 주신 정상적인 인간의 생식기능을 차단한다. 때문에 40년 전 처음 세상에 나올 때 이미 치열한 종교적, 윤리적 논쟁을 거쳤다. 성교 뒤 72시간 내에 복용하는 모닝애프터(성교 뒤 피임약)는 일반 피임약과 성분상 차이가 없다. 하지만 윤리 논쟁에서 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배란을 억제하는 구실을 하는 피임약과 달리 모닝애프터는 이미 생명이 숨쉬는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1997년 미 식품의약국(FDA)이 모닝애프터로 처방할 피임약에 관한 정보를 공표하자 이 약을 피임약이 아니라 낙태약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등 논쟁이 일었다. 그런데 지난 9월 FDA는 임신 49일 이내에 복용해 태아를 지우는 낙태약 RU486의 사용을 허가했다. 프랑스에서는 1988년 이 약의 사용을 승인했다고 하니 그동안 미국에서 허가를 둘러싸고 얼마나 치열한 논란이 일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이들 약 이해의 핵심은 황체호르몬이라고 불리는 프로게스테론에 있다. 임신이 되면 이 호르몬의 농도가 높아져 임신을 유지시키며 배란을 억제한다. 그렇다면 정상인에게 이 호르몬을 투여하여 임신되지 않고도 임신된 것처럼, 즉 배란을 억제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레고리 핀커스는 이런 원리로 제약회사에서 합성한 경구 복용이 가능한 프로게스테론 효과 물질을 주제로 해 1960년 최초로 피임약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뒤 피임약은 임신을 원하지 않은 이들의 필수품 구실을 했다.

낙태약 RU486은 1980년 프랑스 제약회사 루셀-우클라프(RU)에서 부신피질 호르몬의 과량 분비에 기인한 질병을 치료할 약을 찾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이들은 부신피질 호르몬의 작용 부위, 즉 수용체를 차단하는 일련의 물질을 합성하여 시험했다. 그런데 이렇게 찾아낸 RU486은 또한 프로게스테론 수용체도 차단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임신과 함께 자궁내층을 유지시키던 프로게스테론이 효과를 나타내지 못한다면 태아는 지탱하지 못하고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현재 RU486는 루셀-우클라프가 아닌 다른 기업체에서 생산하고 있다. 모기업인 독일 훽스트의 제품이 낙태 반대론자에 의해 위협받은 때문에 훽스트가 약의 권리를 다른 기업체에 넘기도록 했기 때문이다. 약을 갖고 있으면서도 모닝애프터를 제품으로 내놓지 않았던 제약회사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제약회사로서 피임약, 낙태약은 기피대상이다. 근본적으로 이들 약은 환자가 아닌 정상인에게 투여한다는 점에서 약화사고 소송에서 불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 숙명여대 교수·과학평론가 dir@kopsa.or.kr


.




↑Back to the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