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학 ] 2000년08월30일 제324호 

[과학] 밀레니엄 과학읽기/ 빠른 고속도로, 볼 것 없는 풍경

최근 우리나라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을 보면, 그 역동성과 빠름에 저절로 탄성이 나올 지경이다. 어느새 새로운 기술을 둘러싸고 말이 많은 독일 분위기에 익숙해져서인지 현재 한국에서 진행되는 이 분야 기술 발전 속도는 더욱 놀랍게 느껴진다. 통신 분야가 국가 독점으로 있다가 불과 몇년 사이에 민영화가 진행된 탓도 있기는 하지만, 이곳 독일의 정보·통신기술은 서울에 비하면, 느림보 거북이도 이런 거북이가 있나 할 정도다. 최근에야 이곳에서는 일반인들에 대한 ISDN 서비스, 이동통신 서비스들이 저렴하게 제공되게 되었을 뿐, 한국에서 진행되는 초고속정보망 서비스는 요원한 이야기이다.

초고속 정보망이 전국 곳곳에 뻗쳐 있다는 점 하나로도 우리가 이른바 선진 독일을 앞서가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세계 2위를 자랑하는 휴대폰 보유율도 있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사회 기간망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 정보망의 앞선 건설은 앞으로의 정보기술 발전에 있어서 아주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간망을 이용한 사업 기술의 노하우를 뒤쳐진 유럽으로 수출할 수도 있고, 새로운 사업을 미리 구상하여 이른바 시장 선점의 이익을 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이들 정보기술 발전을 지켜보면서, 지나치게 하드웨어 기술에만 집착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우려가 든다. 널찍한 고속도로는 있는데, 그위를 가로질러 다녀올 만한 곳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근사한 이름에 끌려 도착해 보면, 막상 그렇게 빨리 달려와야 했었나 할 정도로 궁색하기 그지없는 정보만을 얻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학술 관련 사이트, 정부 관련 사이트, 토론방 너나 할 것없이 역시나 하고 나올 수밖에 없다. 동영상을 빠르게 전달할 수 있으니, 인터넷게임을 하는 이들에게는 아주 매력적일 것이라는 느낌은 들었다. 하지만 나처럼 고루한(?) 정보를 찾아나선 이로서는 할 수 없이 그에 비하면 느리고 촌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독일 사이트로 다시 발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다.

이곳에서는 원하면 독일 국회 속기록들은 물론 근간 정부 자료들, 최근 유전자 기술을 둘러싼 의사·철학자·생물학자 사이의 열띤 논쟁들, 고전 문헌 자료들 등을 얼마든지 접할 수 있다. 한 사이트에 들어가서도 몇 시간을 탐색할 수가 있다. 최근 학계에서 논쟁이 되고 있는 문제들, 정치가들의 의견 등 심도깊은 논의들을 들여다볼 수가 있다. 그것이 지칠만 하면, 박물관이나 모던 아트 갤러리로 들어가 구텐베르크가 처음 인쇄했다는 성경을, 혹은 끌레의 그림을 감상한다. 여전히 느린 고속도로지만 이들 정보들이 나를 여유롭게 이곳을 활보하도록 유혹한다.

이곳을 여행하다 보면, 정보사회의 핵심은 빠른 하드웨어 기반 기술만으로는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공개된 토론을 기반으로 하는 국회 정치의 기반이 없으면, 인터넷상에 이들 속기록들이 실릴 수 있을 것인가. 질높은 교양 정보를 가공해낼 수 있는 인문학자들이 없다면, 문화 정보들은 나올 수 있는 것일까. 국가가 정책적으로 지원한 도서관 시설이 없다면, 도서관 문헌 정보들은 또한 그렇게 풍부하게 인터넷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인가. 그간 공들여 보존해온 문화유산들이 없다면, 인터넷 모던 아트 갤러리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장 경쟁력을 앞세워 인문 과학에서 소비자 학생들이 선호하지 않은 학과들은 폐과를 할 것이라고 한다. 공학도들을 양산하게 되면, 더 빠른 고속도로 건설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고속도로를 누비면서 탐색할 정보까지 생산해내지는 못한다(물론 공학 정보는 제외하고). 이들 정보 가공을 할 수 있는 인문 과학 인력들을 제대로 길러내지 못하고는 진정한 의미의 정보화사회는 이룰 수 없다. 21세기의 과제는 이들 정보 가공 전문 인력의 양산일 것이다.

박진희/ 베를린 공과대학 기술사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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