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www.hani.co.kr/h21![]() |
![]() |
|
기사섹션 : 움직이는 세계 | 등록 2003.12.17(수) 제489호 |
![]() |
[움직이는세계] [미국] 폭풍전야 LA, 풋볼 하나 때문에 컴퓨터 집계로 대학 풋볼 챔피언 결정전 탈락하자 지역사회가 들고 일어서다
로스앤젤레스(LA)가 시끄럽다. 미국 3대 도시로 350만명이 모여 살지만 큰 소리를 내는 일이 없는 LA 사람들이 저마다 입을 열어 떠들기에 바쁘다.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 모두 한목소리다. 주제는 딱 하나. 바로 대학풋볼 (미식축구) 때문이다.
누구도 1위를 의심하지 않았건만
LA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연고팀 남가주대학(USC) 트로잔스 풋볼팀이 전국 챔피언 결정전에서 탈락한 게 이유다. 그것도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컴퓨터의 장난’으로 밀려난 데 대한 분노의 목소리다. 신문과 방송은 말할 것도 없고 식당, 술집, 심지어 공원에 모인 할머니, 할아버지들까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비분강개의 목소리가 넘치고 있다. 사정은 이렇다. 12월7일(미국 서부시각) 대학풋볼 시즌 마감 랭킹이 발표됐다. USC는 3위로 확정됐다. 전날인 토요일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압도적인 승리로 태평양지구 우승을 차지한 USC 팬들은 정작 최종 랭킹에서 3위로 밀리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2위 이내에 들어야 전국 챔피언 결정전에 나갈 자격을 얻는 현행 방식에서 3위는 왕중왕전 탈락을 의미했다. 누구도 1위를 의심하지 않던 상황이라 충격은 더욱 컸다.
당연한 일이었다. USC는 토요일 밤 발표된 권위 있는 하지만 정작 컴퓨터 집계 공식 랭킹은 전혀 달랐다. 컴퓨터로 산정해보니 USC는 1위 오클라호마대학, 2위 루이지애나주립대(LSU)에 근소한 차로 밀렸다. ‘사람 랭킹’에선 이겼지만 ‘기계 랭킹’에선 진 셈이다. 결국 성적과 전력에서 한수 위로 평가받은 USC는 올해 전국 챔피언전인 ‘슈가볼’에서는 탈락하고 말았다. LA 팬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7일 밤부터 LA 지역 방송에 분노한 팬들의 목소리가 쉴 새 없이 전파를 탔다. <폭스TV> 등 대표적인 텔레비전 방송과 수많은 지역 라디오 방송에서는 잇따라 특집을 마련해 USC 탈락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팬들의 비난을 담아내기에 바빴다. 특히 청취자들의 전화 참여 프로그램이 주종을 이루는 라디오에서는 매일같이 종일토록 흥분한 LA 팬들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신문은 한술 더 떴다. 지역 대표신문
미국에서 3대 일간지로 영향력을 인정받고 있는
인터넷은 차라리 분노의 바다였다. BCS 사이트는 7일 밤부터 다운되기 직전이었다. 팬 페이지엔 욕설과 비난이 끝없이 꼬리를 물었다.
지역 경제도 움직이는 풋볼
이방인의 눈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이 소동은 LA와 대학풋볼, 크게는 미국 사회에서 풋볼의 의미를 모르고는 납득할 수 없다. 풋볼은 한마디로 미국의 국기(國技)다. 그 중 최고 인기는 대학풋볼이다. 한 나라가 대륙으로 이뤄진 미국은 지역연고 의식이 어느 나라보다 뿌리 깊다. 대학풋볼팀은 바로 자신의 연고지를 상징하는 ‘대표팀’인 것이다. 메이저리그 야구가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지만 대학풋볼에는 못 미칠 정도다. 8월에 개막해 매주 토요일 열리는 대학풋볼 경기엔 매번 수만명의 관중이 들어찬다. 미국인들은 누구나 다 자신이 뼛속 깊이(Die-hard) 응원하는 대학풋볼팀이 있고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명문팀이 있는 지역은 연고 대학풋볼팀의 애칭을 따 ‘XX타운’으로 불린다. 일례로 미국 중부의 네브라스카 사람들은 40만 시민 전체가 지역팀인 ‘네브라스카 허스키스’의 열성팬이다. 네브라스카대학은 전국 챔피언을 4차례나 차지한 풋볼 명가. 이 지역 사람들은 네브라스카대학의 성적에 따라 울고 웃는다. 심지어 지역 경제도 성적대로 움직일 정도다. 9승3패로 메이저 볼대회에 나가지 못한 올해는 지난해보다 지역 소비지수가 25% 하락할 것이라는 통계가 이미 나와 있다. LA는 한마디로 ‘트로잔스 타운’이다. 트로잔스 풋볼팀은 매년 1월1일 열리는 100년 전통의 ‘로즈볼’ 단골 우승팀으로 명성을 누려왔다. 미국프로농구(NBA)의 LA 레이커스, 메이저리그 야구의 LA 다저스 등이 있지만 USC 트로잔스 풋볼팀에 대한 사랑에는 턱도 없다. 쌍벽을 이루는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교(UCLA)의 브루인스와 함께 LA 사람들의 애정을 한몸에 받고 있다. 이런 정서에서 USC가 뜻하지 않게 랭킹에서 밀려났으니 ‘LA의 분노’는 당연할 수밖에 없다.
이같은 사태는 왜 일어났을까. 사정은 복잡하다. 전국에 수만개의 대학풋볼팀이 있는 미국은 경기를 거쳐 챔피언을 뽑기가 어렵다. 그래서 수십년 동안 ‘투표 랭킹’에 의존해왔다. 전국의 저명한 스포츠신문·방송기자단이 선정하는 AP투표와 1부 리그 117개 대학팀의 감독들이 뽑는
슈가볼 대신 로즈볼 주가 급등
단순히 팬들의 비판에 그친 것이 아니다. 대학풋볼은 이미 하나의 ‘산업’이다. 10억달러(약 1조2천억원)가 넘는 돈이 오가는 거대한 황금 그라운드다. 경기마다 10만명 가까이 들어오는 입장수입은 차라리 새발의 피다. 슈가볼·로즈볼 등 메이저 볼을 독점 중계하는
하지만 이번 사태로 USC 트로잔스와 LA 지역사회가 잃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는 평가도 있다. 우선 챔피언전인 슈가볼에 못 나가는 대신 USC가 출전하는 전통의 로즈볼 인기가 크게 높아졌다. ‘랭킹 파동’이 LA를 넘어 전국적으로 번지는 바람에 슈가볼은 오히려 2류 대회로 평가절하되는 분위기다. 독점 중계사인
또 ‘명예’도 회복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존심 세기로 유명한 LA 지역사회는 이번 로즈볼이 경제 회생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USC의 상대가 미시간대학이라 더욱 반갑다. 극성팬이 많기로 유명한 미시간대학에서는 이번 로즈볼에 3만명 이상의 원정 응원단이 LA를 방문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들이 뿌리고 갈 돈만 1억달러(약 1200억원) 이상으로 추산된다. 벌써부터 LA의 호텔 등에는 내년 1월 로즈볼 축제 기간 중 예약이 모두 끝나 손님맞이 준비에 여념이 없다.
로스앤젤레스= 신복례/ 자유기고가 boreshin@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