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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든지, 술에 취하든지… 발칸기행(4) 보스니아 전쟁으로 부서진 사라예보 시민들의 삶… 미군의 면책특권은 정당한가
유고슬라비아 최고의 석학이자 코슈투니차 대통령의 정책고문인 프레드리크 시미츠 박사는 “전쟁은 남의 것을 가로채는 도둑질 이상이 아니다”라고 필자에게 강변했다. 이 말은 사라예보에 머무는 동안 필자의 머릿속에 더욱 강하게 각인돼갔다. 30년 전 한국여자탁구팀이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해 감격의 눈물을 흘릴 당시의 사라예보는 이제 남아 있지 않다. 수백년 동안 다민족사회의 조화를 자랑하던 사라예보는 민족갈등의 심연으로 빠져들어 헤어날 줄 모른다.
자취를 감춘 유대인들
보스니아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이라는 말보다는 ‘생존’이란 말을 쓴다. 사라예보의 중심가에서 야생화 다발을 팔아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옐리코 지키츠(36)는 사라예보에 살고 있는 세르비아인의 전형적인 삶을 보여준다. 92년 5월27일, 당시 대학생이던 그는 시내 중심가에서 아르바이트로 신문 가판일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천지를 진동하는 엄청난 굉음이 두번 들렸다. 소리가 난 곳으로 달려갔다. 약 70명이 폭발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많은 사람들이 부상당한 상태였다. 이들을 도와주려고 사고현장으로 접근했으나 정보부원인 듯한 사람들이 강압적으로 접근을 막았다.” 그날의 기억은 끔찍했다. 당시에 일어난 폭발사건은 보스니아를 전면전으로 몰아넣었고, 옐리코 지키츠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참혹한 폭발현장의 모습으로 인해 끝내 그는 정신병을 얻어 병원에 입원하는 처지가 되었다. 다음해 전쟁의 와중에서 어머니도 죽고 여동생은 스위스로 가서 피난민으로 정착했다. 몇해 동안 병원신세를 진 옐리코는 상태가 호전되자 퇴원해 옛날에 살던 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자신이 살던 집은 무슬림 가족의 차지가 돼 있었다. 물론 지금은 집을 되찾은 상태지만 상당히 오랫동안 법정과 관공서를 들락날락해야 했다. 현재 그가 바라는 것은 살던 집을 팔고, 조부에게서 물려받은 땅이 있는 스프스카공화국(보스니아 내 소수 세르비아 민족의 국가)에 가서 정착하는 일이다.
집단촌 이룬 무슬림 전사들
사라예보 거리에서는 지금도 긴 구레나룻과 턱수염을 기르고 둥글고 작은 모자를 머리에 걸친 무슬림 젊은이들을 마주치게 된다. 무자헤딘으로 불리는 이들은 보스니아 전쟁 중 중동이나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이슬람 조국인 보스니아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온 ‘무슬림 전사’들이다. 이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돌아가지 않고 보스니아 여성들과 결혼해 집단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이들은 오사마 빈 라덴의 알카에다 조직이 포함된 다양한 아랍혁명조직 출신들이다. 보스니아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알려진 이들은 당시 미국이 끌어들였다. 그러나 지난해 9·11 참사 뒤 미국에 의해 테러분자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감시 대상으로 처지가 바뀌었다. 몇주 전 미국은 보스니아에서 국제전범재판소에 기소면제특권을 요구해 국제사회로부터 대대적인 비판을 받은 바 있다. 익명을 요구한 보스니아에 주둔하는 한 미군 장교는 “예를 들어 범인이 사는 집이 44번지인데 출동한 미군들이 실수로 46번지에 들어가서 총을 발사해 사람이 죽은 경우에도 전범재판소에 가야 하느냐?”며 기소면제의 타당성을 역설했다. 필자가 그에게 한 말은 아주 간단했다. “사람을 실수로 죽일 수 있나?”
사라예보=글·사진 하영식 전문위원 youngsig@otenet.g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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