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백색테러, 농민의 목을 조르다 사파티스타 자치지역에서 지주의 준군사조직에 의해 암살당하는 멕시코 농민들
“신문에 이름나면 다음날 죽는다”
그날 오후, 멕시코 동남부 치아파스주 북부 산골마을 칸아킬의 옥수수밭에선 14발의 총알 탄피와 약도 한장이 발견되었다. 멕시코 민영 방송사 및 국내외 언론사 기자들은 현장을 취재하느라 분주했고, 미국과 유럽의 인권감시활동가들은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들 주변엔 수백명의 원주민 농민들이 스키마스크를 쓰거나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서 있었다. 이윽고 첼탈족 원주민 마리아 구티에레스가 8월25일 이곳에서 목격한 일을 증언하기 시작했다. “어두컴컴한 새벽이었죠. 남편과 기도회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막 옥수수밭으로 들어서던 참이었어요.” 그때 사람 키의 두배는 족히 될 무성한 옥수수밭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던 그림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림자들의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 그들은 다짜고짜 그의 남편 안토니오 메히아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화들짝 놀란 그는 혼비백산해서 마을을 향해 달아났다. “아길라르 형제들이었어요!”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잠시 뒤 안정을 되찾은 그가 성이 같은 네명의 살인자 이름을 하나씩 거론했다. 살인자들은 남편의 시체를 들고 사라졌다. “시체를 찾으러 오면 마을 주민들을 쏴죽이겠다고 협박했죠. 살인한 다음날엔 공포를 쏘며 마을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어요.” 그는 끝내 오열했다. 준군사집단 아길라르 형제들. 이들은 이미 이 근동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증언에 앞서 한 마을 주민은 기자에게 신문에 이름이 실리면 다음날 죽는다며 이름을 절대로 밝히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1994년 이래 지금까지 이 마을에선 열명이 살해됐어요. 2년 전 죽은 두 청년의 시체는 찾지도 못했죠.” 이들이 살인을 저지른 뒤 시체를 숨기는 이유는 범죄사실을 숨기려는 것이다. “최근엔 마을 주민들에게 오후 5시 넘어서는 돌아다니지 말라고 협박했죠. 이렇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바람에 아이들은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있어요.” 이런 범죄행각에도 아길라르 형제들은 단지 8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풀려났을 뿐이다. 그는 안토니오가 살해된 이유는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운영할 자치학교와 자치가게를 세우고 벽화를 그렸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안토니오 메히아는 사파티스타 원주민 마을 칸아킬의 대표였다. 대농장주이자 제도혁명당(PRI) 지지자들인 아길라르 형제들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수차례 협박을 했고 결국 그를 처형했다. 그야말로 이 지역은 무법천지였다. 그러나 어떻게 이런 일이 수년 동안 묵인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역대 제도혁명당 정부와 카시케(대지주)들의 유착에서 비롯된다. 지난 71년간 제도혁명당에 표를 몰아주는 대신 카시케들은 자기 마을에서 정치·경제·사회적 전권을 행사하며 봉건군주처럼 군림해왔고, 이들이 저지른 범죄들은 묵인되어 왔다.
사건 은폐하기에 바쁜 정부
대지주들이 전전긍긍한 것은 당연했다. 토지매매를 장려한 정부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제도혁명당 정부는 95년 정전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을 향해 대규모 군사공격을 감행했다. 그 뒤 백색경비대는 연방군과 연루된 극우 준군사집단으로 부활해 치아파스 전역에서 악명을 떨치기 시작했다. 아길라르 형제들이라는 집단의 우두머리인 세바스티안 아길라르는 연방군 출신이다. “아길라르 형제의 대농장으로 연방군이 드나드는 것을 수없이 목격했어요.” 마을 주민의 증언은 계속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들의 친척들도 대부분은 연방군이거나 경찰들이죠. 아길라르 형제들은 이들을 통해 무기를 입수했죠.” 칸아킬이 속한 올가 이사벨 반란자치구역 대표가 발언한다.
이들은 스스로 행동하기로 결정했다. 올가 이사벨을 비롯해 7개 반란자치구역 사파티스타 청·장년들이 소집됐다. 이들은 암살자들로부터 동지의 시체를 되찾고 극우의 만행을 중지시키기 위해 칸아킬에 가기로 결정했다. 더불어 외부의 인권단체와 국제 인권감시활동가들이 자신들과 동행할 것을 요청했다. 이 결정이 어떻게 알려졌는지 아길라르 형제들은 8월28일 새벽, 암살장소에 안토니오 메히아의 시체를 버려두었다. 시신은 참혹했다. 왼편 얼굴이 도끼에 찍혀 통째로 날아가고 없었고 두 귀가 잘린 상태였다. 이 엽기적인 만행에 마을 주민들이 몸서리치던 날, 치아파스 주정부의 내무장관 에밀리오 세바두아, 치아파스 주둔 연방군 최고사령관 마리오 페드로 후아레스 나바레테, 연방검사 마리아노 에란 살바티는 “치아파스엔 준군사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이 마을 지도자를 포함해 8월 한달 동안 네명의 사파티스타 원주민 마을 지도자들이 살해당했어요.” 대표적인 원주민 인권단체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인권센터의 전 소장 마리나 파트리시아 히메네스는 최근의 유혈사태가 해당지역에 연방군이 증가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되살아나는 아크테알 대학살의 악몽
사파티스타 원주민들은 공동묘지의 한귀퉁이에 비명에 간 동지의 시신을 묻고 칠흑같은 어둠 속을 달려 칸아킬 마을로 오르는 오솔길로 되돌아왔다. 비가 내리는 밤 내내 가로등 불빛 하나 없는 그곳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샌 이튿날, 이들은 대형 스피커를 앞세우고 평화행진을 벌였다. 그들은 아길라르 형제들이 버린 대농장 건물을 점거한 뒤 성명서를 낭독했다. “우리들은 암살자들이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보지 않을 것입니다.” 사파티스타들의 분노가 암살자들이 거주하는 마을 주변을 감싸기 시작할 때, 집권 국민행동당의 치아파스 대표 톨레도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행동을 즉각 중지시키라”고 연방정부에 요구했다. 또한 그는 “군대가 귀환하는 것은 치안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라며 군대의 증강이 사파티스타의 행동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97년 아크테알에서는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준군사집단이 교회에서 기도를 드리던 초칠족 여자들과 아이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연방검찰의 자체 수사결과 정부의 여러 관리들과 연방군이 연루되었다는 것이 드러났지만 아직까지 이 가공할 만한 범죄의 책임자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때도 주정부와 연방정부는 치아파스엔 준군사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연방군은 그 지역에서 공식적으로는 ‘치안질서’를 확립하고 있었다. 다시 치아파스에서는 아크테알 대학살의 악몽이 살아나고 있다.
치아파스=글·사진 박정훈 전문위원 jhpark2001@yahoo.com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