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공산당의 대부 플로라키스, 그 치열한 전투와 고문의 기억

사진/ 자신의 자서전에서 빨치산 활동 중 찍은 사진을 보여주는 플로라키스. 그는 영국과 그리스 정부의 합의를 거부하고 계속 투쟁을 전개했다.

나치 점령 치하 그리스 전국총파업본부장, 빨치산 대장, 그리스 공산당 대표, 18년간 보호감호와 유배생활….

필자가 1914년생으로 아흔의 문턱에 접어든 그리스의 전설적인 공산주의자 플로라키스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전날 그와 야당 총재와의 만남을 보도하는 TV뉴스를 시청하고 있었다. 그리스 공산당 대표직을 은퇴한 지 오래지만 그리스에서 그의 정치적 입김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 ‘그리스 공산당=플로라키스’라는 등식이 통할 정도다.

나치 치하 총파업 주도

시골의 부농 출신인 그는 어려서부터 세계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중학교 시절, 하교길엔 언제나 노동자센터를 지나가야 했다. 당시 그가 살던 카디차에는 파파스타라티스 담배공장이 있었는데 노동운동이 꽤 활발한 편이었다. 노동자센터는 언제나 담배공장 노동자들로 북적댔다. 이들은 항상 혁명적인 노래를 불렀고, 이들이 부르던 노래는 어린 플로라키스에게 많은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노래 순서가 끝나면 노동자들 중에서 한 연사가 연설을 했다. 학교를 오가면서 기웃거리던 노동자센터는 어린 플로라키스의 정신적 지주가 됐다. 그를 눈여겨본 노동운동가들은 그를 중심으로 청소년 그룹을 조직하기도 했다.

한편 일부 노동자들은 그를 미심쩍은 눈으로 지켜봤다고 한다. “부농의 아들인 플로라키스가 우리가 하는 활동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그는 테스트를 거쳐야 했다. 그 테스트는 노동자센터가 발행하던 혁명적인 신문을 공개적으로 가두판매하는 일이었는데 이는 그의 가족의 이익과 상반되는 일이었다. “개인적으로 많은 갈등을 안겨준 일이었으나 나는 신문을 한장도 남김없이 몽땅 다 팔아치웠어요.” 청소년 시절 그에게 사상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사람은 단순한 건설노동자였다.

1932년 아테네로 오자마자 공산당에 가입했고, 공산주의자로서의 길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의 공산주의 활동은 아테네대학 법대에서 주로 이뤄졌는데, 1학년을 마친 뒤에는 경찰의 추적 때문에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당시에는 공산당이 불법조직이었기 때문에 공산당원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언제든지 경찰에 구속될 수 있었다. 더 이상 집에도 갈 수 없었고 부모님들도 만날 수 없었다. 뚜렷하게 뭘 해서가 아니라 그냥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이유가 전부였다. 어쨌든 그는 1935년에 체포되어 몇달간의 감옥살이를 하고 나서 풀려난다.

독일 나치가 그리스를 침공한 1942년 겨울에는 많은 사람들이 굶주려 죽어갔다. “굶주려서 죽어간 사람들은 아테네 거리 어디서나 볼 수 있었어요. 하루는 젊은 집배원이 우체국에 들어오자마자 쓰러져서 죽었죠. 모두들 총파업을 부르짖었습니다.” 유럽에서 나치에 대항한 최초의 총파업이 그리스 전역에서 벌어졌다. 당시 그가 전국총파업투쟁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는데 요구사항은 일정량의 식량배급이었다. 전국총파업이 끝나자마자 그는 빨치산이 되어 산으로 들어갔다.

1.5m 독방에 갇혀 죽음과 싸우다

사진/ 빨치산 활동 당시의 모습. 빨치산들은 나치를 몰아냈지만 뒤이어 들어온 영국군과 다시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는 자신의 전기에 실린 사진들을 보여주며 빨치산 활동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가 들어간 산은 아테네 주변에 있는 파르네스산이었다. 초기 빨치산 대원들의 수는 100명 정도로 대부분 나치군과 나치 협력자들에게 쫓겨서 온 사람들이었다. 나치군과의 치열한 전투가 지속됐고 전세가 불리해진 나치군은 그리스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나치가 물러난 뒤 모두들 평화를 갈망하고 있었지만 빨치산들은 여전히 쫓기는 신세였다. 나치에 뒤이어 들어온 영국군과의 전투가 또 시작됐다. 그러나 빨치산들은 화력에서 앞선 영국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공산당 지도부는 무장해제에 합의하는 ‘바르키자 합의’에 서명하게 된다. “물론 나는 (바르키자 합의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당 지도부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말했지만 당 지도부가 내린 결정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어요. 바르키자 합의는 중대한 실책이었죠. 당시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이집트에 있던 왕의 망명정부가 다시 그리스를 다스리기 위해 돌아온다는 것에 합의하는 내용이었어요.” 그의 한탄은 이어졌다. “우린 당시 영국에 대해서도 너무 몰랐어요. 대부분의 빨치산 부대에는 두세명의 영국 군인들이 배치돼 있었어요. 나중에 나치가 물러난 뒤 이들이 영국의 스파이였다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죠.”

바르키자 합의에 따르지 않았던 그는 무기를 숨긴 상태에서 은둔생활을 했고 상황이 악화되자 다시 무기를 들고 산으로 돌아갔다. 내전 중 빨치산들과 함께 나치군에 대항해서 싸웠던 영국 병사들은 그리스 군인들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다. 소비에트가 그리스 빨치산을 지원했는지 묻자 그는 강하게 부정했다. “절대로 지원받은 적 없어요. 그리스 빨치산은 홀로 싸웠습니다. 우리는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었어요. 당시 우리는 전 그리스를 지배했으니까요.” 그는 바르키자 합의로 인해 그리스 공산주의운동이 내리막길을 걷게 됐다고 말한다. 만약 계속 싸워나갔더라면 그리스는 달라졌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리스 내전은 1947년에 끝난 것으로 역사서들에 기록돼 있지만, 그는 1954년까지 계속 산에 머물렀다. 당시 그리스 공산당 최고지도자로 부상한 그가 계속 산에서 활동한 이유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테러 때문이었다. 1949년부터 1953년까지 시가지에서 공산당원에 대한 테러가 자주 발생했다. 아테네 시내에서는 많은 공산당원들이 우익의 습격으로 죽어갔다. 산에서 내려온 뒤 그는 바로 체포됐다. “경찰서로 끌려가서 신문을 당했는데 내 이름을 묻더라고요. 모른다고 하니까 금방 따귀를 올려붙였어요. 지금도 나를 고문했던 경찰관들의 이름을 기억합니다. 당시 유명했던 빨갱이 사냥꾼 람브로스가 내 지문을 채취해갔어요. 이들은 나에 대한 신원조회를 끝낸 뒤 공산당의 최고지도자를 체포했다면서 잔치를 했죠. 반면 내게는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난 다리도 제대로 펴지 못하는 가로세로 1.5m 길이의 감방으로 던져졌죠. 그곳에서의 고문은 다름 아닌 자라나는 발톱이었어요. 발톱이 멋대로 자라 철문을 압박하면서 고통을 줬지만 가위를 주지 않아 발톱을 자를 수 없었어요. 또 바닥을 시멘트로 울퉁불퉁하게 만들어놓아 제대로 편하게 누울 수도 없었죠. 완전히 고립된 채 3∼4개월을 그렇게 보냈습니다. 가족들조차도 내가 어디 있는지 몰랐다죠.” 3개월이 지난 뒤에야 당시 총리였던 파파고스는 그가 체포됐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파파고스는 그를 소련의 첩자로 몰아붙였다. 당시 그리스 정부는 그를 정치적인 인질로 이용하여 사이프러스에 대한 소련의 정책에 영향을 주려고 했다. 이때 그는 사형선고를 받고 이 감옥 저 감옥으로 옮겨다니는 신세가 됐고 20년 뒤 군부독재가 끝나는 1974년이 돼서야 자유의 몸이 됐다.

“통일은 한국 사람의 손에”

1974년 감옥에서 나온 그는 합법화된 공산당의 대표가 되었고 공산당 조직의 재건과 정상적인 운영을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특히 그리스 공산당의 의회진출은 돋보인다. 선거 때마다 10명 안팎의 의원들을 의회에 진입시켰다. 플로라키스는 “동구권이 붕괴한 뒤 유럽에서 당명과 강령을 바꾸지 않고 이어오고 있는 유일한 공산당이 그리스 공산당”이라며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8년 전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을 만난 적도 있다. 당시 김주석은 같은 빨치산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를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그리스와 남북한은 똑같이 위도 38도에 걸쳐 위치한 국가들이면서 유사한 현대사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필자는 마지막으로 그에게서 한반도 통일에 관한 견해를 듣고 싶었다. “남한은 아시아를 통제하려는 미국의 군사기지 역할을 하고 있어요. 미국은 남한의 통일을 절대로 원치 않습니다. 또한 남한의 우익들도 통일을 원하지 않아요. 그러나 통일은 이뤄져야만 합니다. 통일은 한국 사람들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플로라키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른 서체로) 그리스 마지막 빨치산과의 대화는 그리스 공산당 지도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플로라키스의 인터뷰를 끝으로 마칩니다. 그리스의 상황을 통해 우리 분단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아테네=글·사진 하영식 통신원 youngsig@otenet.g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