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섹션 : 움직이는 세계 등록 2002.02.20(수) 제397호

[움직이는세계] 출산도 식후경? NO!

통신원 NG리포트

벌써 4년도 훨씬 넘은 일이지만, 첫딸 보영이의 출산을 생각하면 아내에게 늘 미안하다.

1997년 12월23일 밤 9시경. 열달간의 기다림 끝에 아내는 첫아기 출산을 위해 시드니 북부에 자리한 RNS(Royal North Shore) 종합병원 산부인과 병동에 입원했다. 다음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였지만, 나에겐 결전의 날이었다. 아침도 드는 둥 마는 둥 병원으로 향했다. 드디어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선 분만실 밖에서 서성이는 남편을 찾기가 힘들다. 법에 정해진 건 아니지만, 분만실에 함께 들어가지 않는 남편은 이상한 사람이 되는 분위기다. 분위기에 민감한 나는 분만실에 있겠냐는 의사의 말에 바로 “예스!” 하고 말았다.

분만실은 괴로웠다. 10시경부터 시작된 산통으로 몸부림치는 아내, 그리고 그런 아내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다들 괴로운 시간이었다. 점심시간이 지났지만 출산이 임박했다는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 긴장했던 의사와 산파도 10분 간격으로 진통의 빈도와 강도만 체크하러 올 뿐이었다. “언제쯤 아기가 나올까요?”라고 묻자 의사는 “잘 모르지만 오후 늦게는 되어야 할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다.

오후 늦게라…. 의미심장한 정보였다. 무작정 버티느니 장기전에 대비해야 하지 않을까? 아침이 부실했던 터라 지독하게 시장했다. 산통을 겪는 아내에겐 미안했지만 나라도 힘이 있어야 산모와 아기를 돌볼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분만실을 나섰다. 근처에 있다는 한국식당을 찾아 1시간가량을 허비하다 끝내 찾지 못하고 허기진 배로 병원으로 돌아왔다.

허탈한 맘으로 분만실 문 앞에 도착하니 창문을 통해 예사롭지 않는 장면이 목격되었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아내 주위로 의사와 산파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뭔 일이 났나?

그때였다. 의사의 성난 목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Where is your husband?”(당신 남편은 어디 있나요?) 출산의 고통을 나누지 않는 매정한 남편에 대한 비난을 가득 담은 어투였다. 급한 맘에 “Here I am!”(저 여기 있어요)이라고 크게 외치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엄청 썰렁한 분위기에서 나를 노려보는 세쌍의 눈동자! 의사와 산파의 눈 두쌍은 한심하다는 듯이, 아내의 눈 한쌍은 고통 속에서도 가득 원망을 담고….

아내는 막 출산을 할 참이었다. 졸지에 이상할 정도로 비정한 남편이 되고 말았다. “분명히 저녁 때는 되어야 아기가 나올 거라고 했는데….” 부끄러움도 잠깐, 상황이 급박해지기 시작했다. 막 아기가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못생겼지만 고생했다. 이놈아…. 여보! 당신도 너무 고생했어!” 고비를 넘긴 아내는 삶은 빨래처럼 퍼져 있었다. 배가 좀 고팠어도 참을 걸 그랬다. 의사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게 잘못이었다. 어쨌든 이런 억울한 연고로 “산고를 겪는 아내를 두고 점심 먹으러 간 남편”이라는 불명예스런 딱지가 붙고 말았다. 점심이라도 제대로 챙겨 먹었더라면 좀 덜 억울했으련만. 아내는 “아무리 첨이고 철이 없다지만 산고중인 아내를 두고 어떻게 밥 생각이 나더냐”고 따졌다. 금강산도 식후경 아니냐고? 하지만 이건 출산이라고….

시드니=정동철 통신원 djeo8085@mail.usyd.edu.au



http://www.hani.co.kr/section-021019000/2002/02/021019000200202200397043.html



The Internet Hankyoreh copyright(c) webmaster@new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