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는세계] 끝없는 일본 우익의 질주

‘새 역사교과서’ 인증 압력에 이어 공영방송 전쟁범죄 시리즈까지 탄압하는 용맹성

일본의 공영방송 는 각국의 전쟁범죄를 다룬 ‘시리즈-전쟁을 어떻게 재판할 것인가’를 지난 1월 말 4차례에 걸쳐 방영했다. 1, 3, 4회분은 다른 국가들의 전쟁범죄를 다뤘고, 2회분은 지난해 말 도쿄에서 열린 ‘여성국제전범법정’을 포함한 일본의 전쟁범죄를 다뤘다. 하지만 2회분의 방송된 내용은 처음에 기획된 것과 전혀 달랐다. 일본 <아사히신문>과 <슈칸 겐다이>는 최근 이같은 사실을 보도하면서, 그 배경에 일본 우익과 거물급 정치인의 개입이 이뤄졌을지 모른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NHK〉가 반일 편향?

문제가 불거지게 된 것은, 이번 프로그램 제작에 협력한 ‘여성국제전범법정’ 주최단체인 ‘바우넷(VAWW-NET) 재팬’이 공개질의서를 제출하면서부터였다. 주최단체의 이름조차 나오지 않은 방송내용에 불복해서였다. 그 프로에 출연했던 다카하시 도쿄대 교수와 요네야마 캘리포니아대학 교수 등도 지난 2월16일 에 면담 요청서를 보냈다. ‘부자연스런 방송’ 내용에 대한 설명을 듣기 위해서였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가 된 것일까. 먼저 <슈칸 겐다이> 등에 소개된, 일본 우익의 거친 ‘항의과정’부터 살펴보자. 지난 1월27일 오전 10시무렵 4층 정면 현관에는 ‘의 반일 편향을 시정하는 국민회의’라는 이름을 내건 단체(우익단체인 유신정당, 가미카제 등이 주축) 30여명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2회분 방송예정인 ‘일본군의 전시(戰時) 성폭력’은 쇼와천황을 전쟁범죄자로 몰아부치는 말도 안되는 프로다. 의 목적은 전쟁범죄를 날조하려는 반일 세뇌다”라며 무려 7시간 동안 경찰과 대치했다. 그러던 중 이번엔 ‘대일본 애국당’의 가두 선전차량 6∼7대가 서쪽 출입문을 돌파해서 현관까지 밀고들어 왔다. 제복을 입은 당원 20여명은 건물 안까지 들어가 약 1시간에 걸쳐 항의했다. 이후에도 항의서한 발송, 프로그램 책임자 등의 집에 대한 협박전화 등이 끊이지 않았다.

이같은 항의 때문일까. 이후 방영된 2회분의 내용은 대폭 수정되었다. 우선 방송시간이 1, 3, 4회에 비해 정확히 4분 단축되었다. 다른 프로그램들은 전부 44분짜리였는데, 유독 2회분만 40분간 방송된 것이다. 이는 무언가가 삭제되었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두 번째로는 2회분만 프로의 앞뒤에 1회분 방송내용의 요약과 3회분에 방송될 전시(戰時) 성폭력을 재판하는 세계적인 흐름에 대한 소개를 했다는 점이다. 세 번째로는 2회분의 제목이 애초 ‘제2차세계대전. 일본군에 의한 성폭력’(<월간 더 텔레비전> 3월호에 소개된 제목) 혹은 ‘일본군의 전시(戰時) 성폭력’(전범법정 주최자쪽에 전달된 제목)이었던 것이, ‘문제시되는 전시 성폭력’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일본군’이라는 글자가 사라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범법정에 대한 의문점들을 늘어놓은 한 대학교수의 코멘트를 방송 이틀 전에 급히 취재해 프로에 삽입시키기도 했다.

생생한 증언들 갑자기 사라져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이상한 점은 전범법정에서 가해병사로 증언한 바 있는 스즈키의 증언이 짤려나갔다는 점이다. 스즈키에게는 방송 2∼3일 전에 방송 책임자로부터 “법정에서의 증언 장면을 사용하게 해달라”는 전화까지 왔었지만, 정작 방송엔 한 장면도 나오지 않았다. 함께 증언했던 전 일본군 병사 가네코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분명해졌다. “삭제·수정된 부분이 있었다면, 구 일본군의 조직적 성폭력 실태를 전범법정이 명백히 하고, 쇼와 천황 등 책임자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것을 전하는 부분이었을 것”이라고 <슈칸 겐다이>의 다케우치 가즈하루 기자는 말한다.

물론 쪽은 이같은 사실을 전면부인하고 있다. 그렇지만 노조회보는 “방송당일 일단 1분이 단축되어 방송 3시간 전에 시사회를 가졌지만, 상층부의 지시로 더욱 단축돼 방송시간이 40분이 되었다. 삭제된 부분에는 전 위안부의 피를 토하는 증언이 있었다”고 폭로하고 있다.

이 문제는 최근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 주일 한국대사관 앞에서의 시위 등 일본내 우익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져가고 있는 과정에서 제기돼, 일본 내 양심적 지식인들로부터 많은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하지만 일본에 우익의 목소리만 높은 것은 아니다. 전범법정을 주최하고, NHK에 공개항의서를 보낸 ‘바우넷 저팬’과 같은 양식있는 목소리 또한 일본에는 건재하다.

도쿄=신명직 통신원 mjshin59@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