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는세계] ‘부패 대통령’에게 철퇴를!도박 뇌물 받은 필리핀 에스트라다 대통령 하야 위기… 야당, 종교계, 시민단체까지 일어서
필리핀 정국이 심상치 않다. 1986년 민중의 힘으로 독재자 마르코스를 축출했던 필리핀 국민들이 이번에는 ‘부정부패’ 에스트라다 대통령의 하야를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월18일 오후 2시, 필리핀의 최대 상업중심지인 마카티 시내 한복판에는 ‘넥타이 부대’들이 중심이 된 시위군중 1만5천여명이 한목소리로 ‘에랍(에스트라다의 애칭) 하야’를 외치고 있었다. 에스트라다의 옛 동지인 필리핀 일로코스 수르주(州)의 루이스 싱손(Singson) 주지사가 지난 10월9일, 에스트라다 필리핀 대통령이 불법 도박업자들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된 이번 대통령 하야시위는 그동안 누적된 사회경제적 불만과 함께 점차 거세지고 있다.
탄핵안 통과는 힘들지만…
1998년 6월 집권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는 조셉 에스트라다 대통령은 애초 참석이 예정돼 있던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에 불참을 통보하는 한편 “나는 결백하며, 이 모든 것이 야당에 의한 모함”이라면서, 이번 스캔들의 불씨인 빙고게임장을 폐쇄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는 도시 서민지역을 돌면서 특유의 대중연설과 다양한 선심공세를 통해 대중의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야당과 종교, 시민단체뿐만 아니라 주요 경제단체와 중산층까지 모처럼 한목소리로 대통령의 하야시위에 나서고 있어서 이번 사태를 쉽게 누그러뜨리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뇌물 스캔들의 도화선인 루이스 싱손 주지사는 “에스트라다 대통령이 21개월 동안 불법도박업자로부터 약 4억페소(860만달러)와 일로코스 수르주의 담배소비세를 면제해주는 조건으로 1억3천만페소(280만달러) 등 약 1140만달러를 챙겼다”며, 자신이 이 뇌물의 전달 역할을 맡았다고 폭로했다. 최근에 그는 에스트라다 대통령이 불법도박업뿐만 아니라 마약, 대만과의 불법관세 혐의에도 연루되어 있다는 등 부패혐의를 잇따라 폭로하고 있다. 더욱이 필리핀 현 부통령이자 사회복지장관을 겸임하고 있는 아로요가 “대통령이 불법도박업자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주장이 제기된 뒤 여러 사람들과 상의 끝에 사회복지장관직을 사임키로 했다”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사태는 더욱 확대되었다. 그는 대통령 하야를 위한 공동전선에 앞장설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필리핀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가톨릭교회의 하이메 신 추기경 역시 성명을 통해 “에스트라다 대통령은 잇단 비리사건들로 국민을 이끌 수 있는 도덕성을 상실했으며 국민을 위해 대통령직에서 물려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면서 국민들에게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하고 있다. 지난 86년 마르코스 대통령을 권좌에서 축출시킨 시민불복종 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신 추기경의 이런 발언은 이례적인 발표로서 가톨릭교회뿐만 아니라 국민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헤르손 알바레스 등 야당의원들은 18일 거액의 수뢰 혐의를 받고 있는 조셉 에스트라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의회를 통한 탄핵소추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다. 미국과 같이 상·하의원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필리핀에서는 하원의원 3분의 1 찬성(전체 재적 219석 중 73표)으로 탄핵재판이 가결되면 22명의 상원의원으로 재판부가 구성되며 이 재판부는 16명 이상의 찬성으로 평결을 내리게 되어 있다. 현재 에스트라다 대통령이 명예총재로 있는 집권여당인 필리핀 평민연합당(LAMP)이 지난 총선에서 상원 13석, 하원 136석을 차지했기 때문에 탄핵의결은 매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의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집권여당 내에서도 내년 5월13일에 치러지는 총선을 앞두고 민심에 민감한 의원들의 이탈이 생기고 있다. 최근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은 “탄핵절차는 오히려 진실을 가릴 뿐이다. 오직 국민의 힘으로 그를 물러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독재투쟁에서 반부패투쟁으로
한편 시민사회단체는 에스트라다 대통령의 축출을 위한 서명운동을 전국의 주요 7개도시에서 시작하고 매주 수요일 대규모 대중집회를 열 계획을 세우고 있다. 여기에는 좌우 정당과 시민사회단체가 함께하는 등 그동안 의견을 달리했던 다양한 단체들이 모처럼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도시빈민연합(UPA)의 브라(30)는 “지금 필리핀 국민은 사회정치 지도층의 총체적 부패를 개혁하기 위한 싸움을 시작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과거 민주화운동은 독재자를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정치, 사회개혁을 향한 총체적 개혁운동이라는 것이다. 현 에스트라다 대통령이 물러나게 되면, 그뒤를 이어 아로요 부통령이 자동적으로 대통령직을 맡게 되어 있으나, 시민사회단체들은 아로요에 대해서도 역시 부패혐의를 제기하고 있다. 마닐라=나효우 통신원nahyowoo@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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