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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세계] 아물지 않는 내전의 상처 ‘인종청소’의 현장 보스니아, 아직도 증오는 남아… 서구의 다민족사회 건설실험 성공할까
“사랑에 국경이 없다는 말은 이곳 보스니아에선 통하기 어렵다. 많은 젊은이들이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종족간의 차이를 뛰어넘는 열정으로 결혼했지만, 지금은 마음고생들을 하며 살고 있다. 주변의 따가운 눈길 때문이다.”(내전이 터지기 2년 전인 90년, 세르비아 여인과 열애 끝에 결혼한 크로아티아인 상인의 푸념) “아무리 돈도 좋지만, 세르비아 사람들이 나를 보면 시비를 걸 게 뻔하다. 잘못하면 맞아죽는데 거길 왜 가나.”(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지역인 팔레에 가려고 하룻동안 택시를 전세내려 했을 때 손을 내젓던 보스니아 회교도 택시기사) “나는 희랍정교를 믿는 세르비아인이지만, 내전 때 라도반 카라드지치의 세르비아세력에 맞서 싸웠다. 내 나라 보스니아를 지키기 위해 많은 세르비아인들이 회교도, 크로아티아인들과 함께 싸웠다. 국제전범으로 기소된 카라드지치는 밀로셰비치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고 본다.”(사라예보에서 컴퓨터 관련사업을 하는 미르사드 옐리치) “우리 지식인들이 문제다. 말로는 조화로운 다민족사회의 건설을 말하지만,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구체적인 어떤 사안을 높고 토론을 벌일 때면 어느 순간에 국가보다 종족이 앞선다.”(세르비아인인 미르코 페야노비치 사라예보대 정치학 교수)
91년 집단학살의 악몽
흔히 보스니아내전으로 불리는 종족간의 분쟁은 80년대 말 90년대 초 동베를린장벽 붕괴와 소연방 해체와 맞물려 유고연방이 분해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참변이었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89년 세르비아의 실권을 잡은 배경에는 ‘위대한 세르비아’ 건설을 깃발로 내걸어 세르비아민족주의를 자극해 대중적 인기를 얻음으로써 가능했다는 게 정설이다. 이는 거꾸로 유고연방 내의 다른 공화국들로부터 경계심을 불러일으켰고, 91년 슬로베니아가 평화적으로, 크로아티아가 전쟁을 거쳐 유고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90년대 전반기의 보스니아는 90년대 후반기의 코소보와 마찬가지로 벨그라드 정권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혹독한 희생을 치러야 했다. 내전의 시작은 91년 10월 이곳 보스니아 회교도들과 크로아티아인들이 중심이 돼 유고연방에서 탈퇴를 선언하고 92년 2월 국민투표에서 이를 확정하면서 벌어졌다. 밀로셰비치의 세르비아민족주의와 이곳 보스니아 세르비아인들의 정서가 맞아떨어졌고, 밀로셰비치는 대포와 무기를 보내 지역 세르비아인들의 무장을 강화했다. 남한땅의 절반 크기로 인구는 400만명 남짓인 이곳 보스니아에서의 내전은 20세기 인류사의 잔인하고 수치스런 전쟁으로 기록된다. 인구의 40%가 피난을 떠나야 했고, 또한 40%의 집들이 불타거나 파괴됐다. 30만명쯤의 시민들이 내전으로 죽었다지만 정확한 통계는 없다. 스레브레니차 지역을 비롯, 내전 희생자 가운데 상당수는 인종청소 차원에서 집단학살을 당했다. 많은 부녀자들, 특히 세르비아인들의 계획적인 성폭행 희생자가 돼 피눈물을 흘려야 했던 곳이 보스니아다. 이 때문에 세르비아인들의 지도자로 내전을 이끌었던 라도반 카라드지치는 헤이그 국제전범재판소에서 밀로셰비치와 더불어 전쟁범죄자로 수배상태다. 4년 가까운 내전 속에 숱한 희생자를 낳은 보스니아내전은 95년 11월 데이튼평화협정으로 끝을 맺었고, 곧이어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나토군이 주축이 된 평화유지군(처음엔 6만 병력의 IFOR, 지금은 1만9천 병력의 SFOR)을 따라 법질서 강화를 위한 유엔 현지기구인 ‘UNMIBH’를 비롯한 국제기구들이 오랜 전란으로 만신창이가 된 이곳으로 들어왔다.
난민 1만5천명 “귀향이 무서워”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흔히 ‘보스니아’로 불리는 이 나라의 공식이름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다. 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다시 두개의 공화국으로 나뉘어 각각의 대통령과 총리, 그리고 의회를 두고 있다. 보스니안 회교도와 크로아티안들이 합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연방’과 세르비아인들의 ‘스르프스카공화국’이 그러하다. 이 두 공화국 연합이 우리가 흔히 부르는 보스니아(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도 명칭의 혼란을 막기 위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국가 차원의 BH’, 이에 속한 두 공화국의 하나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연방은 그저 ‘연방’으로 부른다. 보스니안 회교도와 크로아티안들의 연방은 두 사람의 대통령을 두고 있고, 세르비아인들의 스르프스카공화국도 한명의 대통령, 그래서 모두 합쳐 3명의 대통령이 있다. 이들 세명의 대통령은 8개월마다 한번씩 돌아가며 의장직을 맡아 ‘국가차원의 BH’ 대통령직을 수행한다. 4년이 임기이므로 두 번씩 대표 대통령직을 맡는 셈이다. 지금까지 BH 대통령은 회교도쪽의 알리야 이제테고비치였으나, 10월 중순 건강을 이유로 물러났다. 그는 1995년 세르비아의 밀로셰비치, 크로아티아의 프라뇨 투지만(1999년 사망)과 더불어 데이튼협정에 사인한 당사자다. 95년 말 클린턴 행정부가 중재자로 나서서 맺어진 데이튼평화협정에 따라 내전을 멈추긴 했지만, 그동안 깊어진 갈등의 골을 메우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려야 할 것으로 이곳 사람들은 내다본다. 사라예보대 학장인 바히드 클랴이치 교수(정치학)의 표현대로 “데이튼협정이 전쟁보다야 낫지만, 진정한 평화와는 아직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최근 보스니아 북동쪽 소도시 브르코에서 수백명의 세르비아계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무슬림 주민들에게 돌을 던지며 난동을 일으킨 사건은 보스니아의 긴장이 휴화산마냥 잠복돼 있음을 보여준다. 보스니아 현지를 취재하면서 필자가 겪은 분단의 작은 체험담. ‘국가차원의 BH’ 수도이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연방의 수도인 사라예보에서 스르프스카공화국의 주요도시인 팔예로 가려면, 사라예보 외곽인 도브리냐로 가서 차를 타야 한다. 도브리냐는 말하자면 두 공화국을 가르는 경계선에 위치한 마을이다. 보스니아 회교도 택시기사는 필자를 그곳에 내려놓고 황급히 떠났다. 세르비아인들과 마주쳐서 좋을 일이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그런데 버스정류장에서 사라예보 시내로 전화를 하려고 공중전화에 카드를 넣으니 작동이 안 됐다. 그 전화는 오로지 스르프스카공화국으로만 통하는 전화였다.
1국2체제는 실질적 분단
내전은 이 지역 인구지도를 바꾸었다. 91년 인구비율은 세르비아인 31%, 보스니아 무슬림 44%, 크로아티아인 17%였다. 그러나 미 국무부 자료는 세르비아인들이 40%, 무슬림이 38%, 크로아티아인이 22%로 바뀌었다(98년 통계). 내전이 벌어지기 전 무슬림이 다수였던 보스니아 동부지역은 지금 세르비아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밀로셰비치의 무력지원을 받은 라도반 카라드지치의 인종청소에 많은 무슬림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고달픈 난민 또는 이주민으로 고향마을을 떠났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 통계로는 회교도 사망자가 20만명, 해외 이주 회교도가 20만명으로 전쟁 전 회교도 인구의 5분의 1이 줄어들었다. 그 자신이 회교도인 술레이만 가리브 난민장관은 내전 전인 1991년과 지금의 바뀐 인구지도를 번갈아 가리키며 “저렇게 바뀌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 지냈을까를 생각하면 잠이 안 온다”고 말한다.
총선으로 극단세력 걸러질까
보스니아는 지금 11월11일에 있을 총선으로 분주한 모습이다. 필자가 머물던 시점에선 아직 본격 선거유세가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각 정당들은 250만명쯤으로 추산되는 유권자들을 상대로 한 득표전략을 한창 준비하는 모습이었다. 놀랍게도 보스니아엔 무랴 93개의 정당이 있다. ‘연방’쪽의 주요정당은 민주행동당(SDA)과 사회민주당(SDP)이다. 현재 제1당인인 SDA는 보스니아 회교도들이 주축인 반면, SDP는 무슬림과 크로아티아, 그리고 일부 세르비아인들이 참여한 범국민정당을 깃발로 내걸고 있다. 그런 까닭에 현역의원이자 사라예보대 교수(정치학)를 겸임하고 있는 세아드 아드비치 SDP 부총재는 “갈수록 유권자들의 우리 당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간다”며 총선에서의 제1당을 자신했다. 한편 세르비아쪽 스르프스카공화국의 주요정당은 세르비아민주당(SDS)과 세르비아사회민주당(SNSD)인데, 같은 세르비아민족주의 흐름 속에서도 SDS가 훨씬 과격하다. 현재 전범으로 수배중인 라도반 카라드지치가 지난 90년 창당한 당이 바로 SDS다. SDS의 근거지인 스르프스카공화국의 팔예에서 만난 SNSD 팔예지구당위원장이자 현역의원인 마리코비치 페타르는 벨그라드의 정권교체와 더불어 “세르비아 유권자들의 투표성향이 무조건 극우로 가던 지난날의 행태에서 바뀔 것”이라는 기대감을 보였다.
부패로 생긴 재정적자, 국제사회가 해결?
오늘의 보스니아가 안고 있는 골칫거리 가운데 하나가 고질적인 부패문제다. 지난 8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보고된 한 자료에 따르면, 적어도 해마다 5억달러의 세금원이 정부 고위관리들을 포함한 공무원들의 부패 때문에 새나간다는 지적이 있을 정도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6·25를 겪은 50년대의 한국처럼 자동차공장은 물론 이렇다 할 번듯한 제조업체가 없다. 많은 것들이 수입에 의존한다. 이들 수입품에 대한 관세만 제대로 걷어도 재정적자의 상당폭을 메울 수 있으리라는 지적이다. 그러나 보스니아는 밀수 천국이다. 세무공무원들이 수입업자와 결탁, 적당한 선에서 눈가림하는 일이 비일비재다. 특히 담배밀수가 심각한 것으로 알려진다. 필자는 이곳에서 독일제 담배인 다비도프를 한갑에 2마르크를 주고 샀다. 1달러가 채 안 되는 값이다. 정상적인 수입품이라면 이렇게 낮은 가격을 매길 수 없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담배밀수 하나로 2억3천만달러의 세금원이 사라진 것으로 분석한다. 한마디로 만성적이고 구조적인 부패다.
조심스럽게 부는 변화의 바람
보스니아는 동유럽에서도 가난한 나라에 속한다. 1인당 구매력이 1770달러(1999년)에 지나지 않는다. 같은해 한국의 1인당 구매력이 1만3300달러이니, 어느 정도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교사, 경찰 등 하급공무원들의 월급이 300∼500도이치마르크(150∼250달러)에 지나지 않기에 부패가 따를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있다. 고용창출도 미미해, 대학을 나오고도 일자리가 마땅치 않다. 실업률이 35∼40%에 이른다(1999년). 알바니아, 터키 사람들이 그러했듯 그동안의 내전과 가난에 절망한 탓에 많은 보스니아 사람들이 서유럽으로 옮겨갔다. 미 중앙정보국(CIA)쪽 자료로는 1천명당 26명의 보스니아인들이 해외로 옮겨가는 추세다. 실제로 이곳의 많은 사람들은 형제자매들이 보내주는 해외송금으로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다. 이곳 국민경제는 모든 면에서 해외의존도가 높다. 코소보와 마찬가지로 필자가 보스니아에 머무르는 동안 모든 경비를 독일 마르크화로 지불할 수 있었다. 내전의 상처를 치유하고 조화로운 다민족사회를 건설하려는 국제사회의 노력은 경제적 지원을 중심으로 법질서 유지와 사법체계 정비(UNMIBH), 선거 등을 통한 민주화제도 정착(OSCE), 난민 처우개선(UNHCR), 데이튼평화조약 이행감시(OHR), 평화유지활동(SFOR) 등 다각도로 이뤄지고 있다. 한 가지 문제는 지금까지 국제사회의 재정지원이 주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연방’에만 치중됐고, 세르비아계 주민들이 다수인 스르프스카공화국은 찬밥신세였다는 점이다. 밀로셰비치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탓에 스르프스카공화국 사람들은 데이튼평화협정이 “세르비아의 이해와 충돌하는 조약”으로 마땅찮게 여겨왔고,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재정지원도 받지 못해왔다. 그런 스르프스카에도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 친서방 경향을 보여온 도디크 공화국 총리가 이끄는 온건 SNSD정당이 11월11일의 스르프스카지역 총선에서 SDS를 비롯한 친밀로셰비치 강경파들을 누르고 승리할 가능성이 점쳐진다. 세르비아인으로 사라예보대 정치학교수인 미르코 페야노비치는 “내전의 갈등이 조금씩 봉합되면서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사이에도 국제적 원조를 통한 경제발전의 중요성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고 풀이한다. 밀로셰비치의 몰락, 코슈투니차 정권의 등장도 보스니아 세르비아인들의 정치의식 변화에 주요한 변수로 작용한다는 분석이다. 경제원조라는 당근으로 보스니아의 평화를 담보할 수 있을지, 무엇보다 서구사회의 보스니아 다민족사회 건설 실험이 성공할 것인지 두고볼 일이다.
사라예보=글·사진 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kimsphoto@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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