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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방황하는 남미, 끝은 어디인가 신자유주의 시대, 빈곤과 정치위기로 멍든 땅… “미국이여 우리를 그냥 놔두라”
80년대 이후 중산층 무너져
말 그대로 비참한 생활을 꾸려가는 이들 도시빈민들은 월소득 300달러 미만(5인 가족 기준)인 페루 빈곤층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문제는 이들 빈곤층이 페루 인구의 54%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빈부의 차이가 극심하고 중산층이 제대로 형성돼 있지 않은 페루사회는 곧 오늘의 남미국가들이 지닌 어두운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페루 리마의 퍼시픽대학 총장 살로몬 레르너(법학박사)는 “80년대 이래 남미국가들은 거듭된 경제위기로 중산층은 몰락했고, 그만큼 빈곤층의 두께가 두꺼워졌다”고 진단한다. 스페인학자로서 페루에 35년 동안 살아온 레르너 총장은 “지금이 가장 위기라는 생각을 한다”며 페루와 남미의 내일을 걱정한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변두리에는 현지주민들이 ‘라 카바’라 부르는 빈민촌이 있다. 흙바닥을 파고 들어가 엉성하게 비를 가리는 움막촌으로 수돗물, 전기 공급과는 거리가 멀다. 이들 극빈자들은 아르헨티나 농촌과 파라과이에서 밀려나온 인디오들로, 쥐떼나 파리떼와 더불어 살고 있다. 공중화장실이나 쓰레기장이 따로 없어 악취가 코를 찌른다. 브라질 대도시 곳곳에 널린 빈민촌들은 리마의 빈민촌들과 함께 오늘의 남미가 어디쯤에 서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지난 4월 쿠바 아바나에서 열린 제3세계 국가들의 모임인 77그룹 총회에서 쿠바의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은 세계를 하나의 여객선에 비유했다. 카스트로는 소수의 선진국 승객들이 맑은 물을 마시면서 인터넷과 위성통신전화를 즐기는 반면, 남미를 비롯한 제3세계 승객들은 “지난날 식민지시대에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끌려가는 노예들의 처지와 비슷한 상태”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2차대전이 끝났을 때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오늘과 같은 1조달러 가까운 채무를 지고 있지는 않았다. 이는 1인당 국민총생산 규모로 보면 세계 최고다. 라틴아메리카는 역사상 어느 때보다 가난하고 실업률이 높다”고 목청을 높였다. 카스트로는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금융 체제를 비판하면서 “40년에 걸친 경제제재에도 불구하고 쿠바가 교육, 의료 프로그램 등을 잘 해올 수 있었던 것은 IMF의 회원국이 아닌 덕”이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이른바 서구식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는 쿠바지만, 많은 남미 지식인들이 “쿠바에서 배울 것은 배우자”는 말들을 한다. 이런 분위기는 경제위기를 거듭 겪으면서 남미가 언제까지 미국의 뒷마당으로 남아 있어야 하느냐는 회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국영기업 갉아먹는 외국자본
전체적으로 보면, 현재 회복세에 있다고는 하지만, 지난 2년간의 경제위기는 여러 남미국가들에 지금껏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도시빈민층의 증가도 하나의 부산물이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남미인들의 36.4%가 5인 가족 기준 월소득 300달러 이하인 빈곤층이다(1998년). 베네수엘라의 경우 빈곤층이 무려 67%, 페루는 54%다. 실업률도 80년대 이래 가장 높은 편이다. 남미에서 1인당 국민총생산(GDP) 1만달러로 칠레(1만2400달러)에 이어 가장 잘산다는 아르헨티나도 실업률이 14%다. 콜롬비아(20%), 베네수엘라(18%), 우루과이(12%), 에콰도르(12%), 볼리비아(11.4%)도 높은 실업률을 보이는 중이다. 페루는 7.7%라지만, “리마 시내가 일없이 서성대는 실업자들로 깔려 있다. 7.7%는 어디까지나 정부 공식통계일 뿐 이를 믿기 어렵다”는 게 가톨릭대 경제학교수 하비에르 이구이니의 진단이다.
지난 99년 중남미국가들로 투입된 외국자본은 무려 670억달러. 이 돈들은 채권, 주식투자보다는 직접투자, 즉 민영화된 국영기업 인수에 주로 쓰였다. 우리도 지난 97∼98년 IMF사태를 겪으며 당한 일이지만, 남미의 많은 알짜배기 기업들이 금융위기 탓에 헐값으로 미국 또는 스페인, 영국에 본거지를 둔 다국적 기업들에 팔려갔다.
“당신 나라 한국은 운이 좋다”
후지모리 페루 대통령의 석연치 않은 3선 연임을 부정선거라고 규탄해온 인디오 출신의 야당 대통령 후보 알레한드로 톨레도는 2000년에 갑자기 떠오른 남미의 정치스타다. 지난 93년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어, 한국경제 발전과정에 관심이 많다고 밝힌 그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당신나라 한국은 운이 좋다”고 부러워했다.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역풍이 몰아치기 훨씬 전인 지난 70, 80년대에 한국이 경제의 크기와 국제경쟁력을 키웠던 데 비해 페루는 기회를 놓쳤다는 이야기다. 톨레도는 “지금 우리는 민족자본을 운운할 수 없는 세상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민족자본의 축적이 없는 상황에서 경제를 살리려면 한푼이라도 외자유치가 아쉽다는 것이다. 경제위기, 이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 다국적 기업들의 전횡 등의 고민을 안고 있는 남미국가들은 이와 맞물려 정치적으로도 흔들거리는 모습이다. 최근의 페루 정치위기나 올해 초의 에콰도르 정치격변 등이 그러하다. 일반적으로 민주화 정도를 말할 때 꼽히는 것이 독립된 사법부, 민간정부의 군부 장악, 정치적으로 성숙된 중산층의 존재다. 이런 잣대로 보면 남미가 민주화됐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카스트로가 장기집권하는 쿠바를 뺀 모든 남미국가의 정권은 90년대 들어와 국민들이 투표권을 행사함으로써 태어난 문민정부다.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으로 대표되는 지난날 군사독재는 남미에서 사라졌다. 그렇다고 남미에 민주화 꽃이 활짝 피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민주제도가 벼랑 끝에서 밀려나는 위기를 겪기도 한다. 콜롬비아의 허약한 민간정부는 좌파게릴라와 우파 민병대 사이에서 쩔쩔매는 모습이다. 페루는 후지모리가 투표의 공정성을 의심받는 가운데 3선의 길에 접어들었다. 파라과이에서는 얼마 전 간신히 군사쿠데타를 모면했고, 에콰도르에서도 쿠데타가 있었다. 군부와 인디오들이 함께한 에콰도르 쿠데타 주도세력들은 정권을 잡지는 못했지만, 민선 대통령인 하밀 마후아드를 권좌에서 몰아내고 부통령 구스타보 노보아를 대통령에 앉혔다. 카리스마적인 전 군장교 휴고 차베스가 다시 대권을 쥔 베네수엘라는 총선을 어떻게 치를 것인가로 논란중이다.
독재정권의 그림자는 아직도…
남미국가들의 민주화 정도에 견주어 페루 지식인들이 느끼는 페루민주화 체감지수는 매우 낮다. 리마의 최대 일간지 <엘 코메르시오> 논설주간 휴고 구에라는 “페루의 민주화 정도는 남미에서 가장 뒤떨어졌다. 10점 만점에 우루과이의 민주화지수가 9라면, 아르헨티나 8.5, 브라질 8, 칠레 7.5인 데 비해 페루는 4 정도밖에 안 될 것”이라며 후지모리 정권의 비민주성을 비판한다. 리마의 명문사립대인 퍼시픽대학 총장 살로몬 레르너(법학박사)도 “후지모리의 정치적 소명이 무엇이든간에, 그는 퇴진해야 마땅하다”며 그의 불법적인 3선 연임에 부정적인 시선을 보낸다. 문제는 일반시민들의 정치 불감증이다. 리마 중심지인 산 마르코 광장에서 만난 대졸 중퇴자 로마나 쿠아토르(29)는 “먹고살기 힘든데 신문 볼 틈이 언제 있느냐”고 반문했다. 마땅한 일자리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쿠아토르의 어두운 얼굴은 오늘의 많은 남미청년들이 보이는 얼굴모습이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지난날 남미 군사독재정권들의 인권침해는 지금도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지난 73년, 선거로 뽑힌 사회주의 아옌데 정권을 미 중앙정보국(CIA)의 도움을 받아 폭력적으로 무너뜨렸던 피노체트는 17년 군사독재 동안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살해, 납치, 고문 등으로 끝내는 면책특권을 박탈당하고 법정에 서는 신세가 됐다. 올 들어 파라과이 수도 아순시온 정부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된 한 문서는 라틴아메리카의 군사독재정권들이 정치적 반대자 암살과 실종에 개입했음을 보여주어 충격을 던졌다. ‘독수리작전’이란 이름의 이 문서는 칠레, 우루과이, 브라질, 파라과이, 볼리비아, 아르헨티나의 독재자들이 아순시온에 비밀본부를 두고 정적 탄압을 위해 ‘공조’했음을 보여준다. 현재 조사가 진행중인 이 문서는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가 지난해 영국에 억류돼 있을 때 “나의 행위는 칠레 안에서만 이뤄졌기 때문에, 이에 대한 심판은 칠레에서만 가능하다”는 주장이 허구임을 드러낸다.
콜롬비아 군사지원은 제2의 베트남?
마약전쟁과 관련해 클린턴 행정부가 콜롬비아에 2년에 걸쳐 지출하기로 한 13억달러 군사원조 문제를 놓고 미국 안팎에서는 논란이 뜨겁다. 35년을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 지내온 콜롬비아에 지금 와서 그만한 거액을 지원할 절실한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다. 비판자들은 대규모 군사지원이 사태를 더 악화시킬 뿐이라는 반론 속에, 지난날 베트남전의 악몽을 되살리는 분위기다. 지난날 레이건 대통령은 중남미 독재정권들을 지원하면서 “반군 뒤에는 모스크바와 아바나(카스트로)가 있다”고 주장했다. 콜롬비아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도 그럴듯한 논리다. 콜롬비아반군인 FARC는 그냥 반군이 아니라 미국의 이익과 충돌하는 ‘마약 카르텔’과 연계된 집단이라는 것이다. 백악관 마약정책보좌관 배리 매카프리 장군은 이들 반군을 “마약 게릴라”로 이름 붙였다. 그러나 국토의 40%를 지배할 만큼 세력과 지지를 갖춘 반군을 단순히 마약집단과의 관련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무리가 있다. 콜롬비아 내전은 무장투쟁 측면보다는 인권침해, 즉 민간인 학살과 선택적 암살이 더 큰 이슈다. 콜롬비아의 준군사집단인 우익 민병대의 마구잡이 인권침해 행위는 악명이 높다. 콜롬비아 군부의 일부도 오랫동안 마약거래로 뒷돈을 챙겨온 것으로 알려진다. 8월30일 클린턴 대통령이 아프리카 순방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콜롬비아에 들렀을 때, 이곳 보고타국립대 5천명의 대학생들이 “양키, 고 홈”을 외치며 미대사관 앞에서 성조기를 불태운 것도 미국의 대 콜롬비아 시각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콜롬비아 군원에 대한 미국 내 비판 여론은 “엘살바도르와 베트남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12년에 걸쳐 많은 희생자를 냈던 엘살바도르 내전에 미국이 엄청나게 지원했지만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비판이다. 엘살바도르 내전은 결국 유엔이 중재자로 나서 반군들의 요구 상당부분을 받아들인 뒤 끝났다. 현재 콜롬비아 반군 FARC가 장악하고 있는 지역은 엘살바도르의 20배에 이르는 넓은 지역이다.
남미인의 시각에서 남미를 보자
최근 들어 브라질을 맏형으로 남미국가들이 독자적인 경제 블록을 형성해 2005년으로 예정된 아메리카자유무역지대(FTAA) 시대에 대비할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현재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가입한 미국, 캐나다, 멕시코 3국이 5년 뒤 FTAA로 합칠 경우, 남미국가들의 경쟁력이 뒤질 게 불을 보듯 뻔하므로 지금부터 집단적 대응을 모색하자는 것이다. 9월1일 브라질에서 남미의 정상들이 브라질 선언을 채택, 2002년까지 남미를 하나로 묶는 단일자유무역지대를 만들자고 합의한 것도 그런 모색의 하나다. 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kimsphoto@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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