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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자 이치로 타격자세 바꾸며 메이저리그 적응 성공… 공·수·주 완벽한 활약으로 시애틀을 선두로 견인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의 시애틀 매리너스는 랜디 존슨(애리조나), 켄 그리피 주니어(신시내티), 그리고 알렉스 로드리게스(텍사스) 등의 대형스타를 자의에서건 타의에서건 매년 1명씩 잃었다. 시즌 전만 해도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라던 예상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 1위로 31승11패. 메이저리그 30개팀 중 최고의 승률을 자랑하고 있다. 2위 오클랜드와는 무려 11게임차(한국시간 5월20일 현재 기준). 메이저리그 전문가들의 대부분은 이러한 놀라운 상승세의 가장 큰 원인을 스즈키 이치로(27) 덕으로 돌리고 있다. 단발 현상에서 벗어나 주된 흐름으로 자리잡은 이치로 현상. 그 열풍은 어느 정도일까.
한달 새에 이렇게 바뀌다니…
이치로는 아쉽게 5월20일 뉴욕 양키스전서 삼진 1개 포함, 4타수 무안타에 그쳐 23경기 연속안타 행진을 마감했지만 그의 타율은 3할6푼7리다. 타자들에게 3할6푼7리라는 타율은 어떤 수치일까. 참고로 한국프로야구 통산 타격 1위 장효조(전 삼성 타격코치·현 대불대 인스트럭터)의 통산 타율은 3할3푼3리다. 이치로의 일본 통산 타율은 3할5푼3리. 3할5푼대 이상이면 타격왕을 노려볼 수 있는 수치다. 이치로는 해마다 타격왕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 이치로는 일본프로야구에서 7년 연속 타격왕을 차지했다. 92년 입단 이후 그가 타격에 눈뜬 94년 3할8푼5리를 시작으로 2000년 3할8푼7리까지 단 한해도 거르지 않고 일본야구 최고의 타격을 자랑한 셈이다. 그러나 초밥에 된장국 먹는 일본이다. 티본 스테이크를 먹는 메이저리그와는 다르다. 파워가 곁들여지지 않고서는 메이저리그를 이야기할 수 없다. 180cm의 키에 72kg의 체구로선 그들을 따라갈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이것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살펴보자. 이치로를 가까이 지켜본 이만수 전 삼성 코치(현 시카고 화이트삭스 불펜코치)의 말을 빌린다. “나는 이치로를 보면서 두어달 전 애리조나캠프에서 만났던 그 선수가 맞는지 의구심마저 들었다. 그만큼 그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치로는 시범경기 내내 플라이성 타구와 땅볼을 쳐대면서 일본 타격왕의 이미지를 구기는 듯했다. 하지만 시즌이 시작되자 기다렸다는 듯 무서운 기세로 안타를 쳤다. 이치로의 변화는 타격폼을 바꾼 데서 시작됐다. 스프링캠프 때만 해도 자신의 전형적인 타법인 오른발을 포수쪽으로 빗자루로 쓸 듯이 이동했다가 내딛는 자세였다. 하지만 이번 3연전을 지켜보니 이치로는 타격시 오른발을 바로 내딛는 타법으로 한 템포 빠르게 바꾸어 ML 투수들의 빠른 공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었다. 불과 한달 새에 그는 낯선 폼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적응하고 있다.”(<스포츠투데이> 이만수의 ML산책) 이치로는 일본에서 최대 25홈런까지 기록했다. 그러나 메이저리그 첫해 두달 동안 2홈런을 기록중이다. 미국투수들의 빠른 공에 파워를 최대한 싣는 시계추타법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그는 과감히 타격폼을 개조해 홈런 대신 안타를 꾀했고 이는 1번타자의 역할에 너무도 들어맞는 것이었다. 현재 이치로의 추세로는 산술상으로 메이저리그 최다안타 기록인 257안타(조지 시슬러·세인트루이스 브라운)도 경신 가능하다. 그러나 산술상의 꿈을 과감히 버린다면 96년 로드리게스의 팀 기록 215안타는 충분히 깰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 타격왕의 자존심을 곧추세운 대신 메이저리그에서 생존을 택한 셈이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는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제2의 진주만 습격?
메이저리그식으로 하자면 이치로는 유령(phantom)이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이 갑자기 등장해 신드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란 뜻이다. 미국야구에서 ‘유령’은 이렇게 뛰어난 신예를 가리키는 말이다. 유령은 동시에 허깨비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모든 신인들이 그렇듯 쉽게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치로가 노모처럼 어느 순간 슬럼프에 빠질 수도 있지만 첫해 보여주는 폭발적인 타격력은 가공할 만하다. 그가 몸쪽 공에 약점을 보인다는 것, 그리고 동양인에겐 다소 힘든 162게임의 장기레이스라는 점에서 이치로는 어느 날 갑자기 일본의 거품경제처럼 폭삭 꺼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풍토의 게임’이라는 야구의 상식, 동양타자는 불가능하다는 상식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는 점에서 이치로의 승승장구는 세계야구사의 놀라운 사건임에 틀림없다. 일본은 어떤가. 이치로는 ‘야구하는 포켓몬’이자 제2의 진주만 습격이다. 95년 노모 히데오(보스턴 레드삭스)의 신인왕 돌풍 이후 다시 한번 터진, 그리고 그들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활약이다. 박찬호 이후 식어버린 한국프로야구처럼 그들도 이제 본격적인 메이저리그 후유증을 걱정하게 됐지만 말이다.
우리에게 그는 경악과 좌절
그렇다면 우리에겐? ‘이치로’란 음절은 이제 2001시즌의 한국야구팬에게 경악과 좌절이다. 이곳에서 야구로 밥먹고사는 이들은 특히 그렇다. 몇년 전만 해도 이치로는 정복 가능한 대상이었다. 이종범이 94년 해태 시절 196안타로 시즌 최다안타 기록을 수립할 당시 언론들은 앞다투어 이치로를 들먹였다. 2년마다 열리는 한-일슈퍼게임 때마다 스포츠전문지의 1면 단골제목은 ‘덤벼라 이치로’였다. 이종범이 방망이를 이순신 장군마냥 45도 각도로 허공을 향해 겨냥하는 사진으로. 그러나 이종범의 주니치 퇴출이 공식화된 지금, 이들 둘을 저울 위에 올려놓는 건 무리다. 호사가들은 노모-박찬호 이후 한동안 미국에 진출한 한·일 선수들을 견줘보았는데 만약 이런 ‘견적 비교’로 혹 통쾌함을 맛본 이들이 있다면 이런 짓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깨달았을 듯싶다. 이치로는 너무 멀리 가버렸다. 박찬호가 5년 걸려 일군 피와 땀의 탑을 이치로는 단 6주 만에 건설해버린 것이다.
김성원/ 스포츠투데이 야구부 기자 rough@sports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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