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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궁궐에 가서 조선을 읽으렴 조선왕조 500년의 흥망사 간직한 창덕궁 · 창경궁… 건물에 깃든 사연 전하며 올컬러 사진 수록
서울 시내 한복판에는 5개의 궁궐이 조금씩 떨어져 서 있다. 경복궁·창덕궁·창경궁·경희궁·경운궁(지금의 덕수궁)은 요즘도 가족 나들이나 데이트 코스, 관광지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그렇지만 조선왕조 500년 동안 실제로 이 궁궐을 무대로 어떤 일들이 벌어졌고, 건물들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역사 무대로서의 궁궐에 깊이 들어가
평생 조선사를 연구해온 국사학자 한영우 한림대 한림과학원 특임교수가 쓰고, 궁궐과 한옥 등 문화재 촬영에 전념해온 사진가 김대벽씨가 사진을 찍은 <창덕궁과 창경궁>(열화당·효형출판 공동 출간)은 이 두 궁전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둘러보면서, 그곳에 얽힌 조선왕조의 흥망을 이야기한다. ‘건축물로서의 궁궐’보다는 ‘역사 무대로서의 궁궐’에 초점을 맞춰 그곳에서 펼쳐진 일들을 꼼꼼하게 들려준다. 이들이 특히 창덕궁과 창경궁을 살피게 된 것은 이 두 궁전이 조선시대 내내 왕들이 실제로 살고 정치를 하던 공간이기 때문이다. 종묘·사직과 이어진 경복궁은 가장 권위 있는 ‘법궁’ ‘정궐’이었지만 실제로는 국왕들이 거의 살지 않던 곳이다. 이복동생인 세자 방석을 죽이고, 그를 옹호했던 정도전 일파를 참수하고 친형인 방간까지 축출하고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자신이 골육상잔을 벌인 피의 현장 경복궁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1405년 새로 창덕궁을 짓고 이후 주로 창덕궁에서만 지냈다. 후대의 왕들도 경복궁보다는 창덕궁과 그 부속 궁전인 창경궁을 편하게 여겨 그곳에 머물렀다. 경복궁은 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뒤 오랫동안 복구되지 않은 채 방치되다시피 했다. 창경궁은 성종이 할머니와 어머니 등 많은 대비들의 거처로 지었던 부속 궁전이다. 애초에는 여성들이 거처하는 궁궐이었지만, 임금이 조회할 수 있는 명정전을 비롯해 침전, 세자궁 등이 들어서면서 임금도 살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일제시대 이전에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가르는 담이 없었으며, 두 궁을 합쳐 ‘동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창경궁은 전통적으로 왕이 머무는 곳으로 여겨진 남향이 아닌 동향 궁궐이어서 임금이 살 곳이 아니라는 신하들의 의견도 많았다. 지은이는 조선사에 정통한 학자답게 이 왕궁의 곳곳을 찾아다니며 파란만장한 역사를 태종부터 순종까지 왕조별로 자세히 들려준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나고, 숙종 30년 반청숭명의 상징으로 대보단을 세우고, 정조 시대 문예부흥의 중심지인 규장각이 건설되고 순조 27년 젊은 세자 익종이 중흥의 꿈을 키우며 대리청정을 한 곳이 모두 창덕궁이다. 창경궁은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에 일어난 씻을 수 없는 비극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영조 38년(1762년) 28살이던 사도세자는 휘령전(문정전) 앞뜰에서 칼을 가지고 자결하라는 아버지의 명을 받았으나 이를 거부하자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굶어죽었다.
일반인이 몰랐던 후원… 상처 입은 궁궐
창덕궁과 창경궁, 일반인들에게는 공개되지 않는 후원의 각 건물들도 자세히 소개했다. 건물 자체의 이야기, 건물과 관련된 인물과 사건, 지은이들이 새롭게 찍은 사진들이 잘 정리돼 있다. 이들의 여정에 함께하는 것은 순조의 아들 익종의 대리청정 시대(1827~30)에 제작된 창덕궁과 창경궁 그림 <동궐도>(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다. 지은이들은 19세기 초의 궁궐 모습이 상세하게 그려진 이 그림을 따라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에서 출발해 임금이 신하의 조하를 받던 정전인 인정전, 임금이 즉위하던 인정문, 임금의 초상화(어진)을 모신 선원전, 비서실인 승정원, 내시들의 거처인 내반원, 음식을 만들던 사옹원, 임금이 신하들을 만나보고 정치를 논하던 편전인 선정전과 희정당,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 대비전인 영모당, 세자궁인 성정각, 관물헌, 중희당 등을 정성스레 찍은 사진들과 함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두 궁궐은 왕조의 처참한 쇠락을 목격했다. 조선시대 내내 화재와 전란으로 여러 번 불타고 새로 지어진 두 궁전은 일제강점기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마지막 황제’ 순종이 거처하던 창덕궁은 이미 조선의 궁궐이 아니었고, 통감부의 의도에 따라 통감부 간부들의 연회장으로 변질되면서 전각들이 헐려 자동차 길로 변했다. 창경궁도 1908년 동물원과 식물원이 설치되면서 훨씬 처절하게 훼손되어 명정전 등 일부 전각만이 남고 나버지 건물들은 대부분 헐렸다. 오랫동안 복원작업을 해온 오늘날에도 본래 전당들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은 절반 정도뿐이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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