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 ] 2003년11월20일 제485호 

[판소리의 근현대사] 소리를 이어온 한국의 패트런

판소리가 세계적인 자산으로 널리 인정받게 된 공덕은 동리 신재효(1812~84)에게 돌려야 마땅하다. 중인 출신인 그는 마흔살이 넘자 벼슬을 그만두고 판소리 연구에 전념하면서 광대 양성과 지도에 전 재산을 쏟았다. 본래 기층 민중들의 연희였던 판소리는 18세기 이후부터 서서히 양반 지식인층으로 침투해 기록자를 만나게 됐다. 박유전을 아꼈던 흥선대원군을 비롯해 사대부들이 ‘패트런’ 역할을 맡아 재능 있는 소리꾼들을 후원한 것도 이런 분위기에서였다.

19세기 초반은 판소리사에서 스타시스템이 구축되는 시대였다. 권삼득·송흥록·모흥갑 등 ‘8명창’이 나타나 세련되고 완성된 선율을 정형화했다. 이후 박기홍·송만갑·김창룡·유성준·정정렬 등 ‘5명창’은 유성기의 발전에 힘입어 많은 음반을 취입했고, 일반 대중의 취향에 의존하는 추세도 강해졌다. 당시 명창 동편제의 거장 송만갑은 “소리꾼은 주단포목상과 같아서 비단을 달라는 이에게는 비단을 주고, 무명을 달라는 이에게는 무명을 주어야 한다”는 말로 변화한 시대에 적응해야 하는 소리꾼의 역할을 표현했다. 해방 이후 밀려드는 서양문화 속에서 판소리가 고고히 살아남은 데는 몇몇 지식인과 명창들의 역할이 컸다.

1964년 인간문화재 제도가 생겨나 고사 위기에 처한 창자들을 지원하는 제도가 마련됐고, 1968년엔 박동진이 처음으로 완창 무대를 마련했다. 우리 문화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정기적인 판소리 감상회를 마련하기도 했는데 판소리학회와 브리태니커사가 공동주최해 마련된 이 감상회는 1973~78년 100회를 맞기까지 꾸준히 무대를 이어갔다. 이 소중한 공연의 성과는 이후 <뿌리깊은 나무 판소리 다섯 마당>이라는 20여장의 LP음반으로 정리돼 나왔다. 판소리와 다른 장르와의 교류도 이루어져 ‘소리꾼 중 드물게 서양식 악보를 읽을 줄 알았던’ 안숙선씨는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외국의 재즈 연주자들과의 공동음반 제작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1993년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는 일반인들에게 우리 소리의 유장한 아름다움을 일깨우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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