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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문화 등록 2003.04.30(수) 제457호

[문화] 한성의 가경에 한옥군락이

삼청동의 역사

대한제국 말기 ‘시일야 방성대곡’으로 나라 잃은 비통함을 토로했던 위암 장지연(1864~1921) 선생은 일찍이 삼청동의 경관을 이렇게 묘사했다. “삼청동 골짜기는 바위와 비탈이 깎아지른 듯 나무도 그윽이 우거진 속으로 높은 데서 흐르는 물이 깊은 연못을 짓고 다시 물은 돌바닥 위로 졸졸 흘러 이곳저곳에서 가느다란 폭포를 이루며 물구슬마저 튀기곤 하여 여름철에도 서늘한 기운이 감돌아서 해마다 한여름이면 서울 장안의 놀이꾼 글선비는 말할 것 없고 아낙네들까지도 꾸역꾸역 모여들어서 서로 어깨를 비빌 만큼 발자국 소리도 요란하였다.”(<유삼청동기>(遊三淸洞記))

산과 물이 맑고 인심이 좋아 삼청(三淸)이라 불렸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삼청동은 예로부터 한성 안에서 이름난 가경으로 손꼽혀왔다(도교의 태청·하청·옥청 3위를 제사 지내는 삼청전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유력하다). 궁궐과 가깝고 자연도 아름다워 육조관아에 근무하던 관리와 세도가의 집들이 즐비했는데, 성삼문 집터(화동 23번지 일대), 인현왕후의 친정이 있던 감고당 터(안국동 37번지·덕성여중고), 김옥균 집터(화동 1번지·정독도서관 자리) 등에서 그 자취를 찾을 수 있다. 1917년 지적명세서나 1921년 경성지도를 보아도 북촌 지역의 대형필지는 여흥 민씨 일가(가회동 31번지·계동 105번지)를 비롯해 박영효(가회동 1번지)·한창수(한성은행 대주주·가회동 26번지) 등 당대 세력가들의 소유지로 돼 있다.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기 전인 1960년대까지만 해도 북천은 서울의 고급 주거지로 자부심 강한 한옥마을 동네였다.

흥미로운 점은 이곳 마을의 생김새가 물길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1912년 지적도엔 삼청공원에서 발원한 중학천 물길이 경복궁 동쪽 담장을 따라 흐르는데, 삼청동·사간동·소격동이 좌우에 자리잡고 있다. 또 그 동쪽으로는 가회동 앞에서 운현궁으로 흐르는 개천(지금의 가회동길)을 따라 화동·안국동·송현동이 있다. 중학천은 미국대사관 뒤편을 따라 흘러 청계천과 만나는 제법 수량이 풍부한 물줄기다. 서울시립대 송인호 교수(건축학과)는 “물길들을 따라 동네가 생겨났고, 동네와 동네 사이는 높은 능선들이 경계를 이룬 모습이었다”고 말한다.

삼청동 일대에 지금과 같은 한옥군락이 생겨난 것은 1920년대 후반부터다. 당시 주택경영회사를 운영했던 정세권(건양사), 김종량(경성목재점) 등은 삼청동 35번지, 계동 124번지, 가회동 31, 33, 11번지 등 세도가들의 대형필지와 임야를 사들여 50평 안팎의 작은 필지로 분할한 뒤 한옥을 지어 분양했다. ‘개량한옥’, ‘집장사집’이라고 불리는 이 한옥들은 유리·함석·타일 등 새로운 재료를 덧대고, 평면을 단순·표준화시킨 새로운 도시형 한옥이었다. 송 교수는 “당시엔 이런 도시한옥들이 대규모로 지어지자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훼손한다며 반발하는 여론이 높았다”고 말한다. 환경을 해친다며 반대가 심했던 집들이 오늘날 가장 보존가치가 높은 한옥으로 대접받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동십자각부터 감사원에 이르는 삼청동길에 인위적 손길이 더해진 것은 1923년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부업품 공진회’가 계기가 됐다. 당시 일제는 경복궁 담을 안으로 들여쌓아 인도를 넓히고 중학천변을 다듬었다. 광화문도 뜯어내 민속박물관 앞으로 옮기는 공사를 감행했다. 목원대 김정동 교수(건축과)는 “중학천 위로 난 다리를 건너 사람들이 걸어다녔다”고 말한다. 중학천 물길이 콘크리트 아래로 숨은 것은 1960년대 말 박정희 대통령 때 복개공사가 시작되면서부터다. 이후 1970년대 중반 감사원이 들어서면서 삼청동길은 아스팔트로 완전히 덮였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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