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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문화 등록 2003.01.08(수) 제442호

[문화] 21세기형 ‘사찰순례’

우리나라에서 산에 오르는 것은 절을 찾는 것과 같다. 웬만한 절들은 모두 산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인들의 일상 속에 스며 있는 사찰은, 우리에겐 아직 낯설다.

1997년 건축가협회상을 받은 능인선원(황일인 작·일건 건축사사무소)은 한옥에 지붕을 이고 있는 절집의 고정관념을 깨고 도심 사찰의 대안을 모색한 시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서울 강남구 포이동에 자리잡고 있는 능인선원은 구룡산을 뒷배경으로 삼은 채 양재대로와 바로 맞닿아 있다. 이 건물의 특징은 1천명의 신도가 모이는 대법당을 지하 2층으로 넣고 도서관·교육실·유치원·숙소 등은 지상으로 올린 점이다. 이는 건폐율이 20%밖에 안 되는 악조건을 해결하기 위한 현실적 선택이었는데, 건축가는 이를 기단과 마당이라는 전통 사찰건축의 중요 키워드로 풀어냈다. 화강석으로 치장하고 지하층을 품은 기단은 안마당의 벽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경사지가 많은 우리나라 지형에서 궁궐·사찰을 비롯한 대형 건축물은 물론 개인 건축물에 이르기까지 기단은 대지의 높이 차이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애용돼왔다. 또한 마당은 건물을 주변 자연과 조화시키며 건물 안팎을 이어준다. 설계를 의뢰한 지광 스님이 기자 출신으로 현실적 감각을 견지해서인지, 능인선원은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내세우는 사회복지 시설과 불교의 교리를 강의하는 법당이 주요 기능으로 자리잡고 있다. 은둔자의 공간이 아니라 생활 속의 불교로 자리잡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경기 안성시 죽산면 용설리에 있는 도피안사가 2000년 완공한 향적당은 도심 사찰은 아니지만, 이 시대가 요구하는 합리적 사찰 건축의 모델을 보여준다. 보통 울긋불긋한 단청칠을 한 기와집 일색인 절집에서 이 건물은 콘크리트로 지어졌다. 건축가 이일훈씨는 무엇보다 “돈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옥에 기와지붕을 올리려면 인력과 목재 비용이 워낙 크게 들고 공사기간도 길어진다. 콘크리트로 짓는 것과 비교하면 많게는 10배까지도 차이난다.” 하지만 돈이 적게 들었다고 건축적 의미가 퇴색하는 것은 아니다. 종무소·공양실·청소년 학습실·선방 등 다용도 기능을 갖춘 향적당은 진입부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향적당 입구는 기둥으로 띄운 선방 아래 빈 공간을 거쳐 드나들도록 돼 있는데 ‘활공루’라 불리는 이 빈 공간은 봄부터 가을까지 작은 모임의 공간이 된다. 기둥엔 그래픽 디자이너 안상수 교수(홍익대)가 디자인한 주련이 달려 있다. ‘선지식들 함께 모여 동지를 삼고’ 등 쉽고 단순한 한글 주련 속엔 바다와 같은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활공루에서 2층 선방으로 올라가는 길은 넓어졌다 좁아졌다 환해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하며 새로운 세계로 가는 길을 기대감으로 이끈다. 선방에 들어서면 격자로 짜인 우물천장에서 은근한 조명이 쏟아져내리며 마음을 편안한 빛으로 채운다. 향적당 순례의 끝은 옥상에서 마감한다. 옥상에 올라 계단 꼭대기를 쳐다보면 마치 성당의 종처럼 풍경이 매달려 있다. 하늘의 문, 도솔천이라 불리는 곳인데, 바람이 울려주는 소리를 듣는 장소다. 이일훈씨는 “우리가 오늘날 ‘문화재’로 귀하게 떠받드는 고건축들은 따지고 보면 당대엔 혁신과 실험의 결과물이었다. 마찬가지로 옛 건축의 전통을 되살리는 노력 또한 전통 건축의 형태와 장식을 그대로 본뜨는 것이 아니다. 그 공간적 해석을 새롭게 변용시키는 데 답이 있다”고 말했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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