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속의 정신분석학
인간의 마음은 얼마나 중요한가. 보이지 않지만 육체를 지배하는 질병의 근원이 되는 것이 마음이다. 상담·분석·치료 등 정신분석을 소재로 다루는 우리 소설들이 최근 눈에 띈다. 김형경의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은 유아기의 상처로 인해 사랑을 하지 못하는 주인공이 분석의 도움으로 분노를 버리고 자연스런 여성의 모습을 찾는 치유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조선희의 <열정과 불안>은 후기 산업사회의 징후 속에서 현실에 적응해가는 남자와, 타인의 구원을 통해 자아를 치유하는 상담의사의 이야기다. 역사상 어느 때보다 경쟁이 치열하고 사회구조가 유동적이기에 현대인은 불안하다. 그래서 상처는 쉽게 받고 분노는 치유가 어렵다.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은 소설의 소재로 쓰일 수도 있겠지만 문학을 분석하는 중요한 틀로, 사회를 진단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드는 문화이론으로 넓게 쓰여왔다. 사실 그는 과학자라기보다 시인이었다. 마음을 읽어내는 과학이란 시가 아닌가. 선배를 재해석한 라캉 역시 진리보다 미학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믿는다. 문학의 감동은 어디에서 오는가. 인물의 심리를 잘 그려서 읽는 이의 상처를 치유해줄 때다. 그러기에 잘 쓰인 작품은 그 자체가 이미 분석이요 치유다.
사랑을 다루지 않는 명작이 없고 그것을 사회와 연결시키지 못하는 명작이 없다. 사랑은 잘하면 보약이고 잘못하면 독약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을 살게 하는 동력을 ‘리비도’라고 불렀고, 라캉은 ‘주이상스’라고 부른다. 리비도는 공격적이다. 이 공격성이 삶의 동력이기에 사랑은 연인을 공격하는 것이다. 왜 나와 한몸이 되기 위해서다. 파괴를 하지 않고 통합은 없기에 에로스는 타나토스의 짝이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은 그리 쉽지 않다. 상처는 주는 양보다 받는 양이 더 크기 때문이다. 내 모든 것을 주고 싶은데 너는 왜 그만큼 안 주느냐고 미워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남을 증오하는 분노다. 유아기에 돌봐준 어머니와 하나가 되고 싶은 소망이 연인으로 옮아간 것이고 에로스요, 무의식이요, 근원적 나르시시즘이다.
199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토니 모리슨의 대표작 <소중한 사람>은 흑인 노예로 살았던 여주인공이 노예의 삶을 살지 못하도록 어린 딸을 죽이는 이야기다. 사랑이 지극하면 목숨을 빼앗는다. 그것이 나르시시즘이고 에로스 속에 숨은 타나토스다. 그 딸은 유령이 되어 엄마를 찾아오고 에로스의 탐닉은 마음과 몸을 피폐시킨다. 노예제도는 얼마나 잘못되었던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사랑을 해야 하는가. 리비도는 신경증의 원인일 뿐 아니라 사회적 징후를 비판하는 틀이다.
리비도의 공격성을 이해하고 그것이 얼마나 끈질긴가 이해하는 것이 정신분석의 윤리요 문학이 다루는 주제들이다. 문학은 에로스의 동력이 타나토스인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줄 때 설득력을 얻는다. 어떻게 폭력을 줄이고 사랑을 늘일 것인가. 최근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권지혜의 <뱀장어 스튜>는 매혹의 본질이 낯설음이요, 섹스는 그 낯설음을 파괴하는 폭력임을 세련되게 보여준다. 프랑스에서 남편과 사는 주인공은 이삼년에 한번씩 첫사랑이었던 한국의 남자를 찾아와 결렬한 섹스를 나눈다. 남편은 그녀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음식을 마련해주고 살게 하지만 그녀는 아무도 구속하지 않기에 떠날 수밖에 없었던 첫사랑을 벗어나지 못한다. 왜 헤어짐을 전제로 해야 성이 불타오르고 왜 몇년 만에 만나야 새롭게 타오르는가. 그들이 나누는 성은 꿈틀거리는 뱀장어의 생명력이요 파괴의 죽음충동이다. 서로를 해체하여 하나가 되려는 몸부림이다. 남편은 그것을 푹 고아 보약을 만들어준다. 섹스와 사랑의 차이는 목을 잘리고도 뛰는 닭이 아닐까. 삶을 움직이는 동력은 ‘죽음충동’이다.
‘주이상스’의 공격성을 늦추고 푹 고아 보약을 만드는 것이 파괴를 생산으로 바꾸는 지혜다. 연인이나 삶의 목표는 유아기의 판타지를 투사한 허상이고 죽음의 안식만이 욕망을 충족하는 대타자라면 억울하지 않은 삶을 위해 죽음은 늦춰야 한다. 그러기에 강렬한 반복충동은 삶 그 자체다. 이 반복의 충동은 ‘전이’를 동반한다. 앞선 것을 어딘지 다르게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실은 늦추어진다. 이청준의 장편 <제삼의 현장>은 진실을 밝히려는 수사관과 피의자의 진술을 통해 진실이 어떻게 시간에 의해 지연되는가를 보여준 전이에 관한 소설이다. 제3의 현장은 죽음이라는 단 하나의 진실을 지연시키는 ‘타자’인 것이다.
서술이 타자를 품고 있기에 끝없이 지연되는 것이 삶이고 서사다. 윌리엄 포크너의 <팔월의 빛>은 서술이 어떻게 텅 빈 근원을 맴돌며 전개되는가를 보여주는 독창적인 소설이고, 토니 모리슨의 <술라>는 억압된 타자가 주체의 필연적인 짝임을 보여준다. 그러기에 위의 두 소설들은 서사의 형식이 직선이 아니라 앞선 서술을 다르게 반복하는 나선형임을 보여준다.
무의식은 문학의 타자다. 그것은 삶과 함께 태어나 문학과 역사를 창조하고 움직이는 동력이다.
권택영/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