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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을 현실로! 일상에 침투한 전복적 사유 분석한 <도발-아방가르드 문화사>
그들의 거침없는 도전은 무엇을 남겼나
이처럼 시대의 불화하면서 동시에 호흡할 수밖에 없는 운명의 아방가르드는 필연적인 자기 모순의 함정을 가졌다. 작품에서 구체적인 묘사나 주제, 또는 제재를 하나도 남김없이 제거한 러시아 절대주의 예술가들이나 구성주의자들은 육체성의 한계를 기계성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들의 이러한 이상은 소비에트 건설에 활기를 불어넣었지만 결국 소비에트를 지지하는 것 이외에는 인민들에게 아무런 자유도 주지 않는 스탈린주의에 복무하는 것으로 끝났다. 아방가르드가 주장하는 거침없는 자유와는 대조되는 결말이었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로 오면서 아방가르드는 더욱 혼란스러운 과정을 겪는다. 마약·혼음 등 미국의 다른 지역에서는 은폐되고, 불법화되고, 이상한 일로 여겨지던 모든 일들이 보란 듯이 펼쳐진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히피족, 즉 60년대 “아방가르드 세대의 테마파크”였다. 그러나 우드스탁은 “시장의 승리”이기도 했다. 자유를 택한 히피들의 삶의 방식은 판에 박은 듯 똑같았고, 대학 기숙사 방마다 체 게바라와 지미 헨드릭스 사진이 나란히 걸렸다. 아방가르드주의는 유행이 되어버렸다. 더 이상 변방에서 울리는 비판이 아니라, 한 세대가 내거는 투쟁의 구호가 된 아방가르드는 “더 이상 신념 체계가 아니라, 출생증명서 위에 찍혀 있는 날짜가 되어버린 것이다”. 자신의 작업실을 공장이라고 말한 워홀- 기성 이미지를 무한 복제해내는 워홀의 작업실을 공장이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한 표현이다- 에 이르면 아방가르드 사상은 그 역사상 가장 전복적인 변화를 겪는다. 워홀은 “대중문화 자체가 이미 아방가르드”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었다. 뒤샹은 “레디메이드를 예술로 보았기 때문에” 레디메이드는 예술작품이 됐지만 워홀이 만든 이미지들은 “볼 만한 가치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예술작품이 됐다.
다시 폐허 위에서 미래를 조각한다
이처럼 전투적인 에너지에서 자가당착과 모순으로 옮겨온 아방가르드는 70년대 이후 폐허가 된 자리에서 다시 건물의 밑동부터 짓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100여년 아방가르드의 역사가 형식의 문제였다면 지금부터는 내용의 문제가 된 것이다. 예술가들은 사회운동의 영역 안에 있던 여성주의, 동성애(에이즈), 인종차별주의를 예술영역의 전면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금기를 무대의 중앙으로 끌어오는 아방가르드의 속성은 또 다른 아방가르드의 공격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동성애자의 사도마조히스틱한 모습을 사진에 담은 사진가 메이플소프는 보수주의자뿐 아니라 동성애자, 흑인, 여성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게서 공격을 받았다. 지은이는 인터넷을 통해 단 한번의 클릭으로 전 세계를 옮겨다니고 예술과 정치, 테크놀로지와 일상의 경계가 무너지고 서로의 영역을 넘나드는 지금, 아방가르드적 이념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확실한 건 이 시대에도 한 걸음 더 내딛는 예술가가 존재하고 모든 이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진실을 꿈꾸는 몽상가도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이 아방가르드에게 형태를 부여해줄 수 있을까. 그는 이렇게 자문자답한다. “지미 헨드릭스가 곧잘 말했듯이 이는 경험해 봐야 할 일로 남아 있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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