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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문화 등록 2002.05.08(수) 제408호

[문화] 장이모 후예들 ‘맨땅에 헤딩’

중국영화 6세대 감독들의 지하 탈출기… 상업성 올가미에 검열의 사슬 여전

첸카이거, 장이모 등 5세대로 불리던 중국 감독들이 아시아 영화의 위세를 세계에 떨쳤던 순간은 허장성세였을까. 5세대 감독들이 동양을 신비화하는 오리엔탈리즘의 혐의를 받을 즈음, 90년대와 함께 떠오른 6세대 감독들은 반사적으로 튀어오른 공처럼 중국의 생생한 현실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대가는 만만치 않았다. 국가 검열의 서릿발에 짓눌려 이들의 영화 만들기는 지하로 스며들어가야 했고, 중국 영화는 그만큼 위축됐다. <붉은 수수밭>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던 배우 겸 감독 장원이 2년 전 겪은 사건은 상징적이다. 그는 수십 군데를 자르라는 중국 정부의 지시를 어기고 <귀신이 왔다>를 칸영화제에 출품해 2등상으로 꼽히는 감독상을 받아냈다. 장원의 ‘반항’에 대해 중국 정부는 7년간 영화제작과 감독은 물론 출연까지 금지하는 조처를 내렸다. 일본 제국주의 시절, 한 시골 마을을 점령한 일본군을 소재로 제국주의 문제를 코믹하게 다룬 이 영화가 중국 안에서 상영되지 못한 건 너무나 당연했다.

지하 독립영화 그룹의 합법적 도전

제3회 전주국제영화제(4월26∼5월2일)에 비친 중국 영화의 현재는 또 달랐다. 디지털 프로젝트 ‘삼인삼색’에 참여한 6세대 감독 왕샤오솨이는 “지하 영화들이 모두 지상으로 나오고 있다”고 뜻밖의 ‘증언’을 했다. <나비의 미소>를 들고 전주를 찾은 허젠준 감독도 이를 뒷받침했다. <붉은 구슬> 등 독립영화 두편을 만든 그가 국영 베이징필름스튜디오의 지원을 받아 <나비의 미소>를 만든 것이다. 중국에서 합법적으로 제작된 모든 영화는 국영 스튜디오의 소유와 통제하에 놓이게 된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온 허젠준의 말은 꽤 희망적이다.

“중국영화계는 급변하고 있다. 올해 초 개혁적 조처가 취해졌기 때문이다. 국영 스튜디오가 아닌 개인 영화사도 자기 자본을 들여 영화를 만들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이건 중국 영화 개방의 제1보가 될 것이다. 이 때문에 독립영화 작가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중국에서 지하영화, 지상영화의 구분은 의미를 잃었다.”

허젠준과 왕샤오솨이는 90년대 초 이른바 ‘지하전영’이라 불리는 독립영화 그룹의 시초를 형성한 주역들이다. 지난해 가을, 베이징에서는 최초의 독립영화제가 열려 무려 200편이 넘는 장·단편 영화가 상영되기도 했다.

또 베이징영화아카데미 교수이자 중국에서 최초로 커밍아웃한 지식인이라는 쿠이지엔 감독은 게이들의 이야기를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광대, 무대에 오르다>를 들고 전주를 찾아와 “동성애라는 소재가 중국에서 금기시되고 있지만, 디지털 영화는 심의를 받지 않기 때문에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찍을 수 있다”고 전했다. 디지털 영화에 대한 검열 법규가 아직 마련되지 않은 데다, 35mm 필름 제작에 비해 수십배의 비용 절감 효과가 있어 디지털 영화는 중국 독립영화의 중요한 기반이 되고 있다.

그런데도 낙관적으로 보이지만은 않는다. 당장 전주에 오기로 한 유사오이앙 감독의 <천진두>와 왕옌 감독의 <전쟁중의 청춘>이 중국 당국의 심의를 통과하지 못해 상영이 취소됐다. <천진두>는 일부다처제의 묘사가 중국의 대외 이미지를 해친다는 이유로, <전쟁중의 청춘>은 심의 관계자가 자리를 오래 비우는 바람에 각각 심의를 받지 못했다. 또 4월25일치 <뉴욕타임스>는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를 찾은 중국 감독 왕광리를 다루며 중국에서 합법적으로 영화 만드는 게 얼마나 험난한 길인지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전직 심리학 교수인 왕광리는 상하이 스튜디오의 지원을 받아 일군의 노동자를 등장시킨 <전력을 다하다>를 1999년에 완성했다. 검열 당국이 노동자들이 도박하는 장면을 문제삼기도 했지만 2000년 봄 어렵사리 상영허가를 받았다.

하지만 실제로 중국 전역에 배급돼 상영되는 기회를 갖기란 불가능했다. 마케팅 비용을 마련할 수 없는 여건에다 자국 영화에 대한 관객의 기피증이란 문제가 겹쳤다. 왕광리에게 유일한 대안은 영화제에 참가해 해외 배급의 길을 터는 것으로 보였다. 이것도 쉽지 않았다. 같은 영화라도 해외 영화제에 출품될 때마다 정부의 허가를 새롭게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2001년 네덜란드의 로테르담 영화제에 참가하기 위해 정부의 승인을 요청했지만 허락이 좀체 떨어지지 않았고 결국 왕광리는 필름을 몰래 빼돌려 출품하는 길을 택해야 했다. 도쿄·밴쿠버·샌프란시스코 등으로 이어진 영화제 참가 역시 편법을 동원해야 했다.

이처럼 국가의 통제가 완강하기는 해도 중국의 영화가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올 수 있는 법적 토대가 마련된 건 틀림없어 보인다.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특별감독상을 받은 <침묵의 강>을 들고 전주를 찾은 닝징우는 “동성애, 은행 강도 등 합법적 소재로 찍기 어려운 것만 아니라면 자본을 끌어들여 영화를 찍는 건 자유로워졌다”고 말했다. 모든 영화 자본의 합법화라는 변화에도 새로운 문제는 있다. 매년 할당된 수량만큼 영화를 만들기만 하면 되는 국영 스튜디오와 달리 사적 자본은 수익을 요구한다. 이제 감독들은 검열이란 철조망 통과와 함께 상업성과의 타협이란 이중의 부담을 지게 된 것이다. 물론 선결과제는 돈을 구하는 거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전주를 찾은 감독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89년 베이징필름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늘 두 가지 일을 해왔다. 시나리오 쓰는 것과 돈을 찾아다니는 것. 제작비를 마련하는 과정은 너무나 힘들고 너무나 느리다. 돈이 많다는 시골의 인테리어업자를 무작정 찾아가 부탁해보는 식으로 갖가지 노력을 하고 있다. 에너지가 있으면 찾아다니고, 지치면 그냥 기다리는 식이다. 만약 내게 폭넓은 제작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게 어떤 상황이든 기꺼이 선택할 것이다. 독립영화와 체제순응적 영화의 차이를 말하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 그 구분은 의미가 없다.”

디지털 영화 선호… 이중고 시달려

아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상큼한 영화 <왕수선의 여름>으로 전주를 찾은 리지시안은 ‘돈문제’를 꺼내자 얼굴에 짙은 그늘을 드리우며 말을 이어갔다. “지하영화와 지상영화를 나누는 중요한 기준은 이제 돈, 자본이다”라는 허젠준의 말이 과장처럼 들리지 않는 상황이다.

이런 중국 안의 현실과 무관하게 한국영화 산업과 중국영화 산업의 접촉면은 갈수록 넓어지고 있다. 김성수 감독의 <무사>에서 베이징스튜디오가 자랑하는 일급 스태프를 구해 합작했던 경험이 큰 계기다. 일제시대의 조선인 혁명가 김산을 그리는 <아리랑>을 준비 중인 명필름의 이은 이사는 “<무사>의 중국 합작 방식을 그대로 활용할 생각인데, 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현재 한·중 합작이 10여편 정도 진행 중이라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전주=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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