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일그러진 언론황제의 초상

청년 마르크스주의자에서 우익 언론황제까지… 요미우리신문사 사장 와타나베의 행적을 좇는 <언론과 권력>

최고학부 일류대 출신. 20대에는 마르크스주의자. 30대에는 잘 나가는 신문사의 사회부, 정치부 기자. 40대에 우익의 거물. 50대에는 언론계 황제.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다. 권력에 저항하다 권력의 매력에 홀딱 빠져 오히려 권력 그 자체가 돼버린 엘리트들을 우리는 꽤 많이 알고 있다.

공산당 시절 권력의 맛을 알다

<언론과 권력>(우오즈미 아키라 지음, 김성기 옮김, 롱셀러 펴냄)은 이러한 경로를 밟아 요미우리신문사 사장자리에 이른 와타나베 쓰네오(75)에 대한 전기다. 10년째 요미우리신문사의 사장 겸 주필을 맡고 있는 인물, 일본 신문협회 회장직 역임이라는 설명만으로는 그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정확히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가 젊었을 때 일개 정치부 기자로서 정계를 좌지우지한 예는 무수히 많다. 뒤에 총리가 된 나카소네가 내각에 진출할 수 있는 창구가 없었을 때, 자민당 부총재 오노 반보쿠에게 나카소네를 추천해 1959년 과학기술청 장관으로 만든 이가 그이다. 1965년 한-일조약 교섭 당시에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파견한 중정 5국장 최영택을 오노와 연결시켜 김종필-오히라 회담으로 이어지게 한 일도 있다. 한마디로 그는 언론계 인물이면서 정계 인물이기도 했다. 양쪽을 쥐고 흔든 것이다.

그러면 그는 어떤 인물이기에 그런 권력을 손에 넣었는가? 젊었을 때 그는 얼핏 권력을 혐오하는 인간처럼 보인다. “개인을 억누른다”며 천황제를 혐오한 조숙한 고등학생이었다. 대학 시절에는 전범교수 추방운동에 앞장서고, 군국주의 타도를 외치는 열혈 공산주의자였다. 이 청년이 나중에는 반공주의자이자 우익의 거두가 될 것이라고 누가 예상을 했겠는가. 그러나 얼핏 모순돼보이는 그의 행보에는 일관성이 있다. 한마디로 남이 권력을 부리는 것은 참을 수 없을 만큼 혐오했지만 반대로 자신의 권력행사는 반드시 관철하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공산당 노동절 집회에 “왜 왔냐”라고 물으면 대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공감해서”라고 답하는데 와타나베는 “천황제를 타도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와타나베가 공산당을 나온 원인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상명하복식의 당 지배체제를 뒤엎고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다 실패한 것이 중요한 탈당 이유였다. 이 공산당 경험으로 와타나베는 “한명이 100명을 움직일 수 있다, 200명만 있으면 2만명의 도쿄대학 학생들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고 깨달았다. 권력의 맛을 알기 시작한 것이다.

인맥 관리를 위해 무슨 짓이든…

와타나베는 두 가지 측면에서 권력을 관리했다. 내부적으로는 꾸준한 사내정치로 자기 입지를 굳히고, 외부적으로는 정계인물들과 결탁해 권력을 다졌다. “한명이 100명을 움직일 수 있다”는 공산당 시절의 깨달음은 곧 와타나베가 요미우리신문에 입사했을 때 실전전략으로 이어진다. “열명이 내 사람이면 정치부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그는 정치연구회, 댄스파티, 영어회화팀 등 구실을 붙여 인맥을 만들었다. 요미우리신문을 직장으로 선택한 것 자체가 그의 전략이었다. 와타나베는 “아사히나 마이니치 같은 커다란 신문사에 가서 시간과 노력을 쏟느니, 세 번째 정도의 신문사에 가는 게 이른 시일에 정상으로 올라설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고백한다. 회사를 장악하기 위해 그는 친구 우지이에를 설득해서 요미우리신문에 끌어들인다. 이미 노무라증권에 합격한 친구를 붙들고 ‘넌 신문기자가 어울린다’며 꼬드긴 것이다. 결국 그의 판단은 옳았다. 우지이에는 경제부 특종기자로, 와타나베는 정치부 특종기자로 두각을 나타내며 요미우리 내부의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와타나베는 자신의 그늘 밖에 있는 인물에게는 철저히 배타적이었다. 일본을 떠나 워싱턴 지국장이 되자, 본사 정치부와 항상 연락하면서 자신의 영향권에서 떠난 부하가 누구인가를 꼼꼼히 체크했다. 부하직원도 상당히 들볶았던 모양이다. 보다못한 동료가 ‘그렇게 야단치면 유능한 부하를 키울 수 없다’고 충고하자, “난 유능한 녀석은 필요없다, 사장이 될 거니까. 내 말에 충실하게 따르는 자가 유능한 자다”라고 대꾸했다는 후문이다.

와타나베는 또한 정치부를 출입하면서 수단을 가리지 않고 정계인맥 관리에 신경썼다. 총리 후보 하토야마 이치로의 집에 찾아가 그의 손자들을 등에 태우고 놀며 인맥을 다졌다. 그때 잔디밭을 네발로 기면서 등에 태운 아이 중 한명이 현 일본 정계의 신진 하토야마 유키오였다. 자민당의 오노 부총재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는 신발정리도 마다않았다. 그는 심지어 오노의 정부(情婦) 문제까지 살펴 처리했다. 오노가 사망했을 때, 그의 오래된 정부가 장례식장에 가기를 원했다고 한다. 만일 오노의 부인이 알면 큰 소동이 날 일이었다. 이 일을 중재하기 위해 와타나베는 ‘유골을 갖다줄 테니 장례식에 나타나지 말라’고 설득했다. 유골을 빼돌린 과정이 교묘하다. 후배기자인 후쿠토미는 와타나베의 명령을 받고 손수건을 유골 위에 떨어뜨렸다. 손수건과 함께 유골 일부를 빼돌린 것이다. 이런 식으로 얻은 정보를 다시 권력 재생산에 이용했다. 자기만 특종을 연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통제 아래 활동하는 타사 기자들에게 정보를 나누어주었다. 이 체제에 반발하는 기자는 정보공급에서 제외시켰다. 나중에는 오노를 취재하고자 하는 기자는 와타나베에게 먼저 인사하는 일까지 생겼다.

요미우리를 국가의 품으로?

오노의 정치활동 중에서 한국독자들의 시선을 끌 만한 부분은 5장 ‘한국의 밀사’ 편이다. 국민이 아니라 김종필 등 몇명의 정치가들 손에 놀아나는 한-일보상문제를 통해 당시 한-일외교가 얼마나 후진적이었는지를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이 와중에서도 와타나베는 한·일 정치인 사이를 오가며 영향력을 과시한다. 이 장에서 김종필이 하코네 고와키엔 호텔에서 와타나베와 만나는 장면은 호사가들의 입에 오를 만하다. 새벽 세시까지 술을 마시고 일어난 김씨가 와타나베의 노크소리에 벌거벗은 채 문을 연 것이다.

결국 와타나베는 1991년 그토록 열망하던 요미우리 사장직에 오른다. 이때부터 그는 부수확장에 힘써 ‘1천만부 달성’을 이룬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법. 문제는 이 1천만부를 사수하기 위해 무리한 돈과 인력을 투자하는 데에서 생겼다. 신문을 인쇄할 때부터 읽히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무조건 많이 찍어 보급소에 떠맡긴다. ‘1천만부를 달성한 사장’으로서 그의 이미지를 굳혔기 때문에 부수를 줄이고 이익을 늘리는 방안은 생각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또한 와타나베와 교분이 있는 국회의원의 비리기사가 실리면 ‘업무상 명령’이라며 기사가 빠지는 일까지 생긴다. 저자는 이런 의미에서 와타나베 사장이 요미우리신문을 ‘국가와 대치하는 신문’에서 ‘국가와 한통속이 된 신문’으로 만들었다고 단언한다.

이 책은 교토통신의 법조기자 출신인 우오즈미 아키라가 3년 동안 끈질기게 취재한 결과다. “말 잘못하면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지레 겁먹은 취재원들 때문에 취재과정이 힘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나온 취재결과는 결코 ‘저렇게 열심히 살면 훌륭한 인물이 된다’는 성공담이 아니다. 오히려 ‘환상은 갖지 마라, 이런 자가 잘 나가는 업계가 이 바닥이다’라는 고발에 가깝다.

이민아 기자 min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