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자랑스러워하라, 조작해서라도!고고학사에 길이 남을 후지무라의 사기극… 역사미화가 주업무인 우파학계의 합작품
세계 고고학 서적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다. 부도덕한 학자의 ‘범죄’가 학문에 얼마나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는지를 보여주는 고고학사상 가장 악랄했던 사기극 이야기다. 바로 영국의 ‘필트다운맨’ 사건이다. 1911년 영국의 아마추어 고고학자 필립 도슨은 필트다운 지방에서 원시 인류의 뼈를 찾았다고 발표했다. 기존에 발견된 다른 원인들과는 두개골 구조가 확연하게 다른 이 유골은 그동안 짐작할 길이 없는 초기 인류의 진화과정을 추론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흥분한 고고학계는 이 원인(猿人)에게 발견자 도슨의 이름을 학명으로 붙이고 발견된 지역 이름을 따 필트다운맨이라고 불렀다. 필트다운 지방에는 이 원인 발굴 기념비까지 세워졌다. 그러나 세월이 지날수록 의문이 제기됐다. 필트다운맨이 발견된 지층보다 뒷시대 지층에서 나온 다른 유골이 오히려 더 진화가 안된 형태였기 때문이다. 많은 학자들이 이 점에 의문을 품고 조사에 나섰다. 결과는 도슨의 완벽한 사기극이었다. 원인의 두개골은 사람의 윗머리뼈와 오랑우탄의 턱뼈를 짜맞춘 조작품으로 드러났다.
70만년으로 늘어난 ‘고무줄 역사’
한국의 고고학자들은 같은 학문을 하는 동반자 입장에서 이번 사건을 안타까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일본에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 근본적 배경에 주목하고 있다. 외견상으로는 후지무라 개인의 범죄지만, 그 근저에는 날이 갈수록 우익화 군국주의화되는 일본학계와 일본사회의 흐름이 연결돼 있지 않느냐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후지무라의 속임수가 미리 준비한 유물을 수십만년 전 지층에 묻은 뒤 다시 파내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는데도 일본 고고학계가 감쪽같이 속아넘어가 교과서에 수록했다는 점, 그리고 정통 고고학자도 아닌 일개 아마추어에 불과한 후지무라가 발굴하는 곳에서마다 연대를 갱신하며 일본 역사를 늘려온 주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점 등 미심쩍은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닌 탓이다. 그동안 국내 고고학계는 후지무라가 발굴한 가미타카모리 구석기 유물들이 주변국가들의 구석기 유물과 눈에 띄게 차이가 나는 점 때문에 일본 구석기문화에 대해 반신반의해왔다. 구석기 지층에서 발굴됐다고 하니 믿지 않을 수 없었지만 기존 일본 석기의 고고학적 전통이나 주변국가들의 구석기 유적과는 너무나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90년대 초반까지 일본에는 전기구석기 문화가 없었는데 후지무라가 연이은 발굴에 성공하면서 불과 몇년 사이 일본의 역사시대는 3만여년에서 70만년 전까지 연대가 올라갔다. 그래서 이번 사건도 일본이 그동안 자국 역사의 포장과 미화에 열중해온 일련의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고 국내 학자들은 분석하고 있다. 세계 각국이 자기 나라 역사가 얼마나 오래됐는지를 강조하는 것은 일반적인 경향에 가깝다. 특히 자기나라에 언제부터 인간이 살았느냐는 점은 많은 나라들이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대목이다. 고고학의 경우 연대가 앞설수록 연대측정의 오차가 클 수밖에 없어 구석기 유물은 오차범위가 10만년 이상인 경우도 많다. 그런데도 많은 나라들은 국가적 자긍심 때문에 유물의 연대를 최대치로 잡는다. 또한 개별분야별 유물이나 문화재에도 ‘역사상 최초…’ ‘역사상 최고…’ 등의 수식어를 붙이려고 안간힘을 쓴다.
신석기시대에도 의심의 눈길이
대부분의 나라들은 보통 100만년∼70만년 전 정도를 자기네 역사의 시초로 주장하고 있다. 옛소련의 경우 중앙아시아에서 발견된 유물을 측정결과 100만년 이상이라고 밝히고 있고, 파키스탄학계 역시 자국의 구석기 유적을 100만년 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물론 이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100만년 전이란 수치가 명확하다고 볼 수도 없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3개국도 이런 경향이 심한 편이다. 중국의 경우 250만년 전으로 추정되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유골을 제시하며 인류최초의 원인이 중국땅에 살았다고 주장할 정도다. 우리도 북한은 상원 검은모루 유적을 100만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고, 남한도 최고의 유적인 단양 금굴 동물화석과 청원군 두루봉 유적을 놓고 학자들에 따라 70만년 전부터 20만∼10만년 전까지 의견이 다양한데도 국사교과서에는 가장 오래된 70만년 전으로 수록하고 있다. 문제는 그 중에서도 일본이 심각할 정도로 이런 특성이 강하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런 학계의 흐름은 우익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사회의 분위기와 연관돼 있다. 비록 사건의 개요는 후지무라가 개인적 욕심에 일을 저지른 것이긴 하지만 그뒤에는 그걸 부추기고 박수쳐온 일본사회의 욕망이 숨어 있는 것이다. 우리 고고학계의 한 교수는 “일본은 그동안 다른 나라들의 역사를 폄하하거나 왜곡하는 식으로 자기네의 우수성을 입증하려 했지만 그 방식이 반감만 사고 효과가 없자 아예 자기네 역사가 얼마나 오래됐는지에 매달려왔다”고 최근 일본학계의 흐름을 설명했다. 이번 조작사건도 동아시아 최고의 역사적 흔적인 베이징원인의 연대가 70만년 전가량인데, 일본이 여기에 자기 역사를 대비시켰을 것이란 설명이다. 실제 후지무라의 발굴 성과는 일본 우익계열에 의해 일본의 우수성을 뒷받침하는 이론적 근거로 활용돼왔다. 일본의 대표적인 극우단체인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니시오 간지 회장이 쓴 <국민의 역사>는 후지무라가 발견한 유적을 첫머리에 내세우며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보다 연대가 앞선 문명이 일본에 존재했다”고까지 주장하며 일본을 ‘세계 4대 고대문명’ 가운데 하나로 기술하고 있을 정도다. 또한 일본은 그동안 구석기시대뿐만이 아니라 다른 시기의 역사에 있어서도 주변국가들과의 비교와 경쟁에 열을 올려왔다. 신석기시대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일본 신석기가 최고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이 주장하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유물은 연대가 1만3천년 전까지 거슬러올라간다. 전세계적으로 신석기 유적이 1만년을 넘어가는 경우가 없는데 일본의 신석기 유물만 연대가 3천년 이상 더 돌출돼 있어 우리 학계에서는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고 있다.
수도 없는 역사왜곡의 사례
이같은 자국 역사의 유구함과 우수성에 집착하는 일본학계의 비뚤어진 시각과 자의적인 해석사례는 수두룩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당연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이라고 생각하는 통일신라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대해서도 일본학계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 경전의 제작연대가 분명하지 않은 만큼 현존 최고의 목판인쇄물은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신석기시대 토기에 대해서도 일본 학자들 가운데 일부는 억지성 주장을 펼쳐 한국학계로부터 반발을 사고 있다.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 토기는 대부분 빗살무늬토기로 이는 우리 신석기의 가장 선명한 특징인 데 비해 일본 신석기시대 토기는 거의 대부분 새끼문양이 새겨진 ‘조몽’토기다. 그런데 일본 큐슈지방에서만 유일하게 우리나라 것과 비슷한 빗살무늬토기가 발굴된다.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임효재 교수는 “누가 보더라도 한국의 빗살무늬토기가 한국과 거리가 가까운 큐슈지방에 영향을 준 것으로 추론하지만 아직도 일부 일본 학자들은 정반대로 조몽토기가 남하하면서 빗살무늬토기로 변형돼 한국으로 건너갔다고 주장하고 있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국내 고고학계는 이런 일련의 흐름 속에서 어처구니없는 역사미화의 병폐가 곪을 대로 곪았다가 후지무라 사건으로 터져나왔다고 분석하고 있다. 실제로 후지무라의 발굴에 의해 일본의 역사시대가 70만년 전까지 올라간 것은 90년대로서 거의 최근의 일인데도, 짧은 시간 안에 학문적으로 성과를 인정받고 국사교과서에까지 실린 것은 일본 문부성이 이런 경향을 부추기는 우익적 분위기에 기울어 있는 방증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동안 일본 내에서도 후지무라가 발굴한 유물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었지만 일본학계의 우파들과 문부성이 일사천리로 인정해버렸다. 결국 이런 무리수는 일본에 씻기 어려운 세계적 대망신을 사게 만들었다. 필트타운맨 사건은 과학 수준도 낮았고 인간의 이성이 지금보다는 훨씬 제한됐던 지난 세기의 일이었지만, 후지무라 사건은 첨단을 달리는 21세기, 게다가 선진국임을 자랑해온 일본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더욱 충격적이다. 이제 일본 선사시대의 역사는 후지무라가 자신이 지은 죄를 얼마나 정확하게 기억하고 실토하느냐에 달려 있는 처지가 됐다.
구본준 기자bonbon@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