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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사람과 사회 | 등록 2003.12.11(목) 제48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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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사회] 그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피해자들 “20년도 넘은 일을 또 끄집어내서 뭘 하려고….” 12·12 때 장태완(72·민주당 의원) 당시 수경사령관 등과 함께 진압군쪽에 섰던 하소곤(76) 전 육본작전참모부장은 지난 12월5일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수경사령관실에서 장 사령관과 함께 반란군 진압대책을 논의하던 중 반란군의 발포로 왼쪽 폐를 관통당하는 중상을 입었다. 그는 병원에서 두달 동안 치료받은 뒤 신군부에 의해 강제 전역됐다. 하씨는 그때의 상처로 지금도 가슴에 압박을 느끼는 등 후유증에 시달린다. “인제 얼마 못 살아요. 가만히 있어도 숨이 가쁘고 몸이 안 좋아.” 그는 12·12 이후 처참한 심정으로 세월을 보내다 은행협회 감사와 교통안전진흥공단 이사장을 지내는 등 잠시 공직 생활을 하기도 했다. 하씨에게 총을 쏜 한아무개 대위는 그 뒤 경찰 요직을 거치는 등 승승장구했다. 하씨는 12·12 쿠데타 가담자를 지금도 용서할 수 없다고 한다. “그들이 사법처리를 받긴 했지만, 아직 진정으로 반성하진 않았어요.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나.” 12·12 당시 반란군의 회유를 뿌리치고 응징을 공언했던 장태완 의원은 한사코 인터뷰를 거부했다. 법적으로 반란임이 확정됐고 주동자가 사법처리를 받았기 때문에 더이상 거론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장 의원의 한 보좌관은 “12·12 얘기가 나올 때마다 ‘이제 역사의 평가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고 말씀하신다”고 말했다. 수경사령관에 부임한 지 24일 만에 쿠데타를 맞은 장 의원은 혼신의 힘을 다해 이를 진압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보안사에 끌려가 조사를 받은 뒤 별 두개를 뗀 채 풀려나왔다. 장 의원은 지난 1996년 12·12 및 5·18 사건 재판 때 증인으로 출석해, 전씨 등을 향해 “권력에 눈이 멀어 참다운 군인의 길을 포기한 것에 대해 인간적 연민을 느낀다”고 말해 주위를 숙연케 했다. 반란군의 표적이 됐던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지난해 6월 노환으로 한 많은 인생을 마감했다. 정씨는 신군부 세력에 의해 내란기도 방조 혐의로 체포돼 이등병으로 강등된 뒤 징역형을 받는 등 하극상의 고초를 겪었다. 정씨는 12·12 재판 때 법정에서 “당시 군 후배들에게 겪은 고초는 내 일생 최대의 치욕이었다”며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정씨는 1997년 대법원이 12·12를 쿠데타로 규정하면서 결국 내란기도 방조 혐의에 대해 법원의 무죄판결을 받아 명예를 회복한 뒤, 예비역 군 장성 모임인 성우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들과 달리 쿠데타 주동자에 대한 사법적 단죄를 보지 못한 ‘피해자’도 있다. 12·12 당시 특전사령관으로 반란군에 맞섰던 정병주 전 소장은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줄기차게 요구하다 지난 1989년 3월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됐다. 그의 죽음에 대해 수사기관은 ‘자살’로 결론내렸으나, 당시 그의 사인을 둘러싼 의혹이 끊이질 않았다. 정 사령관과 함께 반란군에 저항했던 김오랑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은 당시 반란군에 가담한 박종규 3공수여단 15대대장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김 소령의 부인 백영옥씨는 6공화국 말기에 남편의 명예회복을 위해 소송을 준비하다 남편과 사별한 지 12년 뒤인 1991년 6월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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