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hani.co.kr/h21

기사섹션 : 사람과 사회 등록 2003.10.22(수) 제481호

[사람과사회] 여학생들, 학교 다니기 짱난다

아직도 머나먼 ‘양성평등 교육문화’만들기… “왜 이과로 왔냐”는 어처구니 없는 경우도

“여학생은 왜 글씨까지 예뻐야 되는 거죠?”

서울의 한 남녀공학 고등학교에 다니는 박아무개(17)양은 얼마 전 글씨를 못 쓴다는 이유로 점수가 깎이는 황당한 경험을 했다. 내용과 분량이 비슷한 다른 남학생의 보고서보다 2점이 낮아 교사에게 이유를 물으니, ‘여자애가 글씨를 그렇게 못 써서 되겠냐. 글씨 연습 더 하라는 의미에서 점수를 깎았다’는 황당한 대답이 돌아온 것이다. “남자애들은 글씨를 좀 못 써도 되지만 여자애들은 안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게다가 ‘다른 여자애들처럼 보고서를 아기자기하게 안 꾸민다’고 되레 혼내시던 걸요.” 박양은 “여자는 왜 얼굴도 몸매도 예쁘고, 심지어 글씨까지 예뻐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바지를 입으면 자태가 흐트러진다?

여학교 교실 칠판 위를 ‘정숙’과 ‘순결’이라는 급훈이 장식하던 때가 있었다. 복도를 걸을 때는 발끝을 들어 사뿐사뿐 걸어야 하고, 앉을 때는 다리를 왼쪽으로 가지런히 모아 손은 무릎 위에 올려놓고, 얼굴은 살짝 옆으로 틀어 아래쪽으로 ‘시선처리’ 하도록 교육받았다. 가사시간에는 손바닥만한 한복 저고리를 만드느라 손가락 찔려가며 바늘을 놀렸고, “여자들은 남자보다 뇌 크기가 작아 공부를 남학생보다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두뇌능력의 한계’를 세뇌당하기도 했다. 순종적이고 다소 소극적인, 하지만 ‘참하다’는 단어로 포장된 ‘규수 양성’이 중요하던 시절이었다.

‘여성의 사회활동 영역이 다양하게 확대되고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도 사라지고 있다’(교육부 발간 자료집)는 2003년 가을, 학교 현장에서 여학생 교육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교육부는 지난 1999년부터 사회 곳곳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성차별적 요소를 없애고 평등한 사회를 구현한다는 목표 아래 양성평등 교육을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다. 교과서의 성차별적 요소를 수정하는 한편, ‘양성평등 학교문화, 우리 함께 만듭니다’는 제목의 홍보자료집을 펴내 교사와 학부모들의 이해와 참여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덕분에 제도적인 부분은 많이 개선되었지만,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강요하는 상황은 여전히 남아 있다.

여학생을 제약하는 가장 대표적인 제도는 치마교복이다. 치마교복을 입어본 사람은 안다. 여름에는 허벅지에 쩍쩍 달라붙는 교복 속치마 때문에 책받침으로 치마 밑을 부채질해야 하고, 겨울에는 찬바람에 연신 종아리를 비벼대야 한다. 치마 밑으로 바람이 숭숭 들어오면 털끝이 바짝 서는 기분이다. 게다가 치마는 행동을 제약한다. 차를 타거나 앉을 때, 계단을 오를 때, 수업시간에 앉아 있을 때도 행여 속옷이 보일까 걱정이다. 어쩌다 친구들끼리 말뚝박기 놀이라도 하는 날에는 ‘계집애들이 방정맞게 치마 입고 설쳐댄다’며 선생님들에게 구박받기 일쑤고, 남학생들처럼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하다.

교육부가 지난 2000년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교복을 입는 전국 3552개 학교 가운데 치마를 교복으로 택한 학교는 76.3%인 2826개교로 나타났다. 치마나 바지를 학생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학교는 19.4%(714개교)로 나타났으며, 바지교복을 택한 학교는 22개교에 불과했다. 당시 교육부는 조사결과를 발표하면서 학교운영위원회가 학기 초 여학생 교복을 결정할 때 학생들이 스스로 치마 또는 바지를 선택해 입을 수 있도록 관련 규정을 개선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후 상황에 대한 통계는 집계되지 않았다.

여학생 출석번호는 왜 뒤에 있나

서울 대원외국어고등학교는 5년 전 교복을 입기 시작하면서 여학생들에게 치마와 교복 중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바지가 익숙한 학생들이 많고 일상생활이 불편하다는 점을 들어 여학생들이 건의했고, 학교는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서울 한성여자중학교와 석관중학교 등 남녀공학을 중심으로 여학생들에게 바지교복을 허용하는 추세도 확대되고 있다.

하지만 바지교복에 대한 논의가 학교 담장 안에서 이뤄지다 보니, 학생이나 학부모가 요구를 하더라도 학교에서 아예 공식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서울 ㅊ여고 학생회는 지난해 “바지교복을 선택할 수 있게 해달라”며 학교쪽에 정식 요청했다. 행동이 불편한데다 특히 겨울에 추위를 견디기가 어렵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여성은 치마를 입어야 몸가짐을 바르게 할 수 있다. 또 바지를 입으면 여성의 자태가 흐트러진다”는 교장선생님의 대답이 돌아왔을 뿐이다.

이 학교 ㄱ(17)양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친구들은 겨울에 체육복 바지를 입기도 하는데, 이를 본 선생님들이 ‘나이도 창창한 애들이 춥기는 뭐가 춥냐’며 호통을 치기 일쑤”라며 “학교에서 바지교복을 거부한 이후에는 보수적인 학교 분위기 탓에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학부모 박아무개(39)씨는 올 초 중학교에 입학한 딸(13)이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통에 한동안 진땀을 빼야 했다. 사춘기가 일찍 찾아온 딸은 초등학교 4학년 이후에는 바지만 고집했고,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교복치마를 입어야 하는 것이 고역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체념한 딸이 안쓰럽다는 박씨는 “당시 ‘사건’을 겪으면서 학교가 그저 여자라면 항상 치마를 입고 다소곳해야 한다는 구시대적 여성관을 학습시키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했다”고 꼬집었다.

여학생과 남학생을 구분해 고정된 성역할을 학습시키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서울시 교육청 산하에서 운영되는 ‘여학생 교육분원’과 여학교 자체 생활관에서 이뤄지는 예절교육은 고정적인 성역할을 주입시키는 ‘주범’으로 지목되곤 한다. 각 학교에서 위탁을 받아 ‘필수적인 전통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이뤄지는 프로그램은 장보기, 식품 관리·조리, 식사예절, 뷔페상 차림, 전통차 예절, 양정식 상차림 등이다. 몇년 전부터 남학생 예절교육도 함께 실시한다지만, ‘여학생 교육분원’이라는 이름이 알려주듯 서울 시내 여고생들을 주된 교육대상으로 삼고 있다. 서울 ㅊ여고는 2학년을 대상으로 이틀간 아예 수업을 하지 않는 대신 요리와 밥상 차리기, 과일깎기 등을 가르친다.

진영옥 전교조 여성위원장은 “예절교육이라는 명분 아래 여학생들에게 ‘좋은 주부’ ‘좋은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교육시킨다”며 “양성평등을 강조하는 교육과정의 추세를 학교 관리자나 교사들이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진 위원장의 지적처럼, 양성평등 교육의 발목을 잡는 주범은 이미 몸에 밴 관행과 교사들의 의식부족이다. 양성평등이 새정부 10대 국정과제로 정해질 만큼 중요성은 강조되지만 학교 현장이 수용하는 속도는 더디고 형식적이다.

서울 ㅇ고등학교는 ‘양성평등의식 함양을 위한 학교 교육환경을 조성한다’며 각종 글짓기 대회와 표어 공모, 소견 발표회 등을 열고 있다. 이 학교 복도에는 ‘양성평등 우리가 이룩하자’ ‘여성 남성 구분 없다’는 표어도 붙어 있지만, 학생들의 반응은 뜨악하다. 심지어 전교생에게 어깨띠를 매고 ‘교내 양성평등을 위한 궐기대회’에 참석해 궐기문을 낭독하도록 하는 등 국민동원 체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다른 학교에서는 그나마 이런 노력도 찾아보기 어렵다. 남녀혼성 학급은 대부분 여학생들의 출석부 번호가 남학생들의 뒷번호부터 주어진다. 한 반에 여학생과 남학생이 15명씩이라면 남학생은 1번부터 15번까지, 여학생은 16번부터 30번까지인 셈이다. 여성부가 지난 2001년 ‘여학생 번호를 남학생 뒤로 넘긴 것은 여성이 항상 남성 다음이라는 차별적 감정을 초래할 수 있다”며 남녀차별이라고 결정한 전례가 있지만, 이를 시정한 학교는 찾아보기 어렵다.

남자애들의 교실꾸미기는 말리고…

교무실 책상 닦기와 화분 물 주기, 교실 꾸미기도 대부분 여학생들의 몫이다. 남학생들이 여학생들과 함께 교실 꾸미기에 나설라치면, “남자애들이 이런 일 하는 거 아니다”라며 선생님들이 말리는 경우도 있다.

고등학교에서 이과를 선택한 여학생들은 남자 선생님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기도 한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싶어 이과를 택했다는 서울 ㄱ고 이아무개(17)양은 수업시간에 종종 ‘죄책감’을 느낀다고 털어놨다. “‘여자애들이 왜 이과로 오냐’며 이상하게 쳐다보는 선생님도 있고, ‘너희들 때문에 남자들끼리 하는 얘기를 못하겠다’며 투덜거리는 선생님도 있어요.” 이양은 쓴웃음을 지었다.

전문가들은 성차별 문제는 ‘지식’의 문제가 아닌 ‘감성’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교사와 학부모, 학생들의 몸에 익숙해진 고정관념과 차별을 ‘양성평등’이라는 선언적인 구호만으로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조옥라 서강대 교수(사회학과)는 “폭력이 만연해 있으면 폭력이 무뎌지듯이 여성과 남성 사이의 문제도 워낙 뿌리가 깊다보니 평소에 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며 “‘어떠어떠해야 한다’는 당위론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차이를 인정하고 이해하도록 하는 장기적인 교육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양성평등 교육은 결국 ‘소통의 교육’이다. 자신과 다른 처지를 인정하고 그 입장에서 이해하며, 다름이 차별로 이어질 때는 부당함에 대해 정당히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주는 것이다. 양성평등 교육이 필요한 이유다

최혜정 기자 idun@hani.co.kr



http://www.hani.co.kr/section-021014000/2003/10/021014000200310220481041.html



The Hankyoreh Plus copyright(c) webmaster@new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