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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사람과 사회 | 등록 2003.01.02(목) 제44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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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회] 젊은 그들의 ‘준비된 선택’ 대중문화로 학습하며 감수성의 혁명 이끌어내… 오늘의 20대는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 당선자로 확정됐을 때, 나는 젊은 친구들과 개표방송을 보며 기성세대(좁은 의미에서는 이른바 386세대)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하면서 나는 속으로 ‘꽤 그럴듯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덧붙이기를 가족이기주의와 성적 지상주의 아래서 너희를 혹사시켰을 뿐인 오랜 식민지와 독재의 터널을 빠져나오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가혹한 경쟁의 깔때기 속으로, 희미한 학원가의 형광등 불빛 아래로 우겨넣은 기성세대가 그나마 유일하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죄책의 행위로서 노무현을 선물했다고 말했다.
그것은 젊은 세대의 자발적 선택이었다
나는 곧 내 말을 수정했다. 노무현은 젊은 세대가 스스로 선택한 정답이었으며 오히려 감사해야 할 쪽은 기성세대가 아닐까라고 말이다. 다음날, 언론은 성급하게 ‘젊은 세대를 겨냥한 선거전략의 승리’라고 썼다. 그 때문에 나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물론 노무현 진영의 선거 캠페인은 세련되고 정갈했다. 이 측면만 보면 댄스 음악이나 좋아하고, PC방에 처박혀 있는 젊은 세대가 ‘우연히’ 텔레비전을 보다가 ‘기타 치는 노무현’을 보고 “야, 멋있는데” 하고 그 쪽으로 투표했다는 얘기가 된다. 어리석은 분석이다. 젊은 세대를 하나의 정치적 무뇌아로 상정한다면 혹시 부분적으로 맞을지 모르지만 사실인즉 노무현쪽이 젊은 세대를 공략한 것이 아니라 젊은 세대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차분하게 복기를 할 수 있게 되자 언론은 이번에는 ‘젊은 세대의 선거혁명’이라는 공식을 쓰기 시작했다. 새로운 세대가 ‘탄생’했다 과연 그들은 새롭게 탄생한 ‘신인류’인가. 돌이켜보면 그들은 이미 오래전에 태어났으며 상황에 따라 명칭만 달리 불렸을 뿐이다. X세대, N세대, W세대를 거쳐 그들은 대선에 도착했다. 이 또한 역사의 단순 진화과정에 따른 기승전결의 완결판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말하자면 무정형의 혼란 속에서 자생해(X세대), 스스로 발신자이자 수신자가 되어(N세대), 개인적 열정과 집합적 목표의 조화를 이룬 뒤(W세대) 비로소 모범적인 정치적 자아로 성숙했다는 식의 순차적 귀결로 정리할 수는 없다. 묘목이 거목으로 커가는 자연변증법의 인과율처럼 한 세대가 X-N-W를 거쳐 대선 ‘승리’로 귀결됐다는 방정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다. 인간은 매우 복합적이며 또한 정말 단순한 생물이다. 젊은 세대 역시 마찬가지다. 그 앞세대는 대학가 술집에서 포크 음악을 부르는 것조차 몹시 주저했다. 자취방에 가서야 몰래 들국화를 들었다. 이율배반의 문화 취향에 대한 필요 이상의 강박적 죄책감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젊은 세대는 심지어 나이키를 신고 촛불시위에 나간다. 경쾌하면서도 진지하고 복합적이면서 단순하다.
대중문화를 스승으로 삼아 정치학습
무엇이 그들을 단련시켰는가. 그들은 왜 노무현을 선택했는가. 나는 주저 없이 대중문화가 그들의 진정한 스승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어떤 ‘좋은’ 대중문화가 그들을 성장시킨 게 아니다. 말하자면 서태지를 들으며 학교 교육의 모순을 깨닫고, 저항적 힙합 가사로 기성관습을 조롱하면서 ‘정치학습’을 한 끝에 노무현을 찍었다는 얘기가 아니다. 여기에는 좀더 근원적인 ‘감수성의 혁명’이 내재돼 있다. 그들은 지난 10년 가까이 왕성한 소화력으로 모든 종류의 대중문화를 통해 스스로 학습했다. 기성세대가 그들에게 베푼 교육이라고는 좀더 나은 과외선생과 좀더 좋은 학원을 물색하는 것뿐이었다. 그곳에서 그들의 육체는 시들었지만 왕성하게 분비하는 호르몬이 그들의 감수성을 자극해 스스로 진화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가 립싱크에 표절혐의까지 받았을 때 그들은 지구가 휘청거릴 정도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답답한 현실의 유일한 ‘쾌락’이었기 때문에 그것에 조금이라도 불순물이 낀 것을 확인하면 그들은 극도의 좌절감을 맛보았을 것이다. 아마 인터넷 게시판에 가서 옹호도 하고 비난도 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선택과 비판, 지지와 옹호를 연습했다. 욕설도 주고받았지만 문맥 속에서 욕설은 지지와 비판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았다. 이 조건 속에서 이회창은 이른바 ‘빠순이’이란 용어를 부적절하게 썼고, 노무현은 기타를 치며 서투르지만 진지하게 노래를 불렀다. 단순 해프닝처럼 보이지만 사실인즉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어마어마한 감수성의 격차. 당신이라면 누구를 선택하겠는가. 아마 트랜스젠더 연예인 하리수 때문에 젊은 친구들은 약간의 정체성 문제를 겪기도 했을 것이다. 같은 반 여학생을 좋아하는 심리상태가 자매애인지 동성애인지 무척 ‘걱정’도 했을 것이다. 사춘기 초입에 연예인 비디오 파문을 겪고 이제 대학생이 된 뒤(우연의 일치로) 대선 즈음에 법적으로 ‘여성성’을 공인받은 하리수의 선택을 보면서, 그렇게 그들은 ‘다양성과 공존’의 원리를 터득한 것이었다. 기성세대에게 하리수는 윤리적 금기 대상이다. 하지만 젊은 세대에게 하리수는 어떤 경우라도 개인의 기질 특이성이 훼손당하는 일은 없어야 하는 상식의 증거일 뿐이다. 그들은 두발 자유화를 쟁취했고 머리를 염색했다. 지난 10년 가까이 그들은 왕성한 식욕으로 대중문화의 온갖 요소를 소화해내며, 취미·기호·성향·관심사·감수성의 ‘다양성과 공존’을 익혀왔기 때문에 하리수를 낡은 관습의 터널을 빠져나온 새로운 세대의 윤리 헌장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하리수에게 배우고 논술로 익혀
그것이 새로운 세대의 원칙과 상식이다. 지엽적 사안이지만 원칙과 상식은 젊은 세대가 논술시험을 공부하며 익힌 것이다. 논술시험의 특성상(‘21세기의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라’는 식의 주문) 젊은 세대는 다양한 시사문제에 조금은 ‘진보’적인 관점으로 익힐 수밖에 없는데, 이 점 또한 ‘나라다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이회창 대신 ‘사진이나 찍으러 미국에 가지는 않겠다’는 노무현과 정서적 일체감을 갖게 한다. 물론 젊은 세대의 선택이 말의 참뜻에서 ‘참여 민주주의와 선거혁명’을 이룬 것이라고 평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러나 정치적 무뇌아들이 상대적으로 젊고 신선해보이는 후보를 골랐다는 해석은 세대의 감수성을, 문화적 동인의 힘을 표피적으로 관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번 대선은 젊은 세대 감수성의 혁명이었으며, 그 속에 이미 정책과 비전의 평가가 내포돼 있다. 젊은 세대는 말한다. “노무현, 멋있잖아!” 이 한마디에 지난 10년 역사가 농축돼 있다.
정윤수/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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