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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사람과 사회 등록 2002.08.08(목) 제421호

[사람과 사회] 양심의 대열, 분대 만든다

대학생 임치윤씨 양심적 병역거부 선언… 반전·평화의 가치 지키려는 소박한 저항

이번에는 채 한달이 지나지 않았다. 지난해 12월17일 평화주의자 오태양씨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선언한 뒤 다른 젊은이가 정치적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를 선언하기까지는 6개월 남짓 시간이 걸렸다. 지난 7월2일 민주노동당 서울 동작지구당 사무차장 유호근씨가 병역거부를 선언한 것이다(<한겨레21> 418호). 그리고 이어 7월30일, 이번에는 대학생 한명이 또다시 같은 길로 들어섰다. 다음 선언자가 나오는 기간은 그렇게 점점 짧아지고 있다.

“지금 저는 범죄를 저지르려 합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우리 사회는 이것을 범죄라고 부르니까요.”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선언한 임치윤(25·동아대 3년)씨. 병무청에 제출한 그의 소견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는 이날 부산지방병무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전쟁과 폭력에 관련된 어떤 직간접적 행위에도 관여하고 싶지 않으며, 반전과 평화를 인생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양심적 병역거부는 이 신념에 따른 자연스런 행동”이라고 밝혔다.

입대일에 병무청 앞에서 기자회견

기자회견 사흘 뒤 임씨는 “그동안 많은 친구들과 선배들이 놀라서 전화를 걸어왔다”며 “후련한 마음이 앞서지만 한편으로는 ‘군대가기 싫어 그런다’는 오해를 받을까 걱정도 된다”고 말했다. 대학에서 학회 활동을 하며 친구들과 어울리기 좋아했던 그에게도 병역거부 문제만큼은 마음을 열어놓고 의논할 상대가 거의 없었던 탓이다.

그는 앞서 병역거부를 선언한 오태양·유호근씨와는 다소 성격이 다른 삶을 살아왔다. 그의 아버지는 ‘여호와의 증인’ 신자다. 임씨 자신도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아버지를 따라 종교행사에 참여했다. 그러나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사회문제에도 무관심한 증인 생활을 더 이상 할 수 없어” 여호와의 증인에서 탈퇴했다. “학교 다니기 힘들어” 고등학교까지 자퇴한 다음 검정고시를 통해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사회과학 서적을 읽으며 자신의 인생관을 정리했다. 그는 이 기간을 ‘방황의 시기’였다고 표현했다.

그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대학생 임씨’는 그동안 “아무런 종교도 없고, 학생운동도 하지 않고, 친구들과 놀기 좋아하고, 귀를 뚫어 귀걸이도 하는 그저 평범한 대학생”일 뿐이었다. 그러나 지난 99년 대학을 입학할 때 이미 굳혔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의 신념은 그를 더 이상 평범한 대학생으로 놔두지 않았다. 지난해 초 처음 입영통지서를 받았을 때 그는 혼자서 부딪혀볼 생각으로 휴학까지 했었다. “그때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도 조성되지 않았고, 어디에 이 문제를 의논해야 할지도 몰라 정말 막막했다”고 임씨는 당시를 떠올렸다.

입대일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를 알게 된 그는 이곳의 조언을 받아 입대를 연기했다. 그리고 두 번째 받은 입영통지서에 적혀 있던 입대일인 지난 7월30일 결국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부산지방병무청 지호경 징집과장은 “닷새간의 유예기간을 주고 그때까지 입대하지 않으면 병역기피자로 고발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임씨는 “하루빨리 대체복무제가 개선돼 일이 잘 풀리기를 바라지만 감옥에 가는 것도 각오하고 있다”고 말했다.

“병역기피자 고발도 두렵지 않다”

임씨의 병역거부는 이전의 병역거부자들과 달리 특정 종교나 사회운동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의 병역거부는 또하나의 병역거부가 아니라 새로운 병역거부다. 그로 인해 그만큼 병역거부의 폭이 넓어진 셈이다. 임씨의 병역거부에 맞춰 부산 지역에서도 부산인권센터 등 시민단체들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을 인정하고 대체복무제도의 개선을 촉구하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기에 이른 그의 행동을 뒷받침하는 논리는 대단한 데서 나온 게 아니었다. “<플래툰> <지옥의 묵시록> 같은 전쟁영화나 전쟁을 다룬 문학작품을 보면 무엇을 느낍니까? 저는 ‘이 세상에서 전쟁과 폭력은 사라져야 하고 내가 먼저 그것을 위해 행동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대부분 사람들이 군 복무를 어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로 생각하지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고, 많지는 않겠지만 저와 같이 생각하고 그 생각에 따라 소신껏 행동하는 사람이 앞으로 계속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임씨는 당분간 집에서 경찰 조사에 대비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출할 진정서를 준비할 계획이다. “어쩌면 감옥에 갈 수도 있고 전과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나를 힘들게 하지만, 무엇보다 힘든 것은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외떨어져 있다는 고립감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혼자가 아니다. 그보다 앞서 병역거부를 선언한 오태양씨와 유호근씨가 있고, 그가 그랬듯 ‘또 다른 임치윤’은 언제고 등장할 것이다.

부산=최상원/ 한겨레 민권사회2부 기자 cs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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