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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아 강물아 내 고향아 지역 문화단체가 함께한 전남 장흥 수몰지구 덕산마을 사람들의 ‘서러운 축제’
빛바랜 사진첩이 하늘을 보다
버스정류장 안에서 다리쉼을 하고 있는 김영순(73·유치면 신풍1구) 할머니는 사진에 눈을 박고 있다가 간간이 눈에 손등을 가져다 댔다. “다 친구들이고 형제지간 같은 사람들이라우. 맨날 한 들에서 일하고, 같이 들밥 나눠먹던 사람들 아니요. 그란디 벌써 떠나븐 사람도 있고, 남아 있다고 하제마는 이제 곧 갈린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나요.”
버스정류장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1km 남짓. 그림 같은 유치천이 흐르고 급류에 휩쓸렸는지 다리는 아리랑 춤을 추며 물길 위에 얹혀 있다. 그리고는 반듯하게 쭉 뻗은 포장길이다. 양 옆으로 오색 만장이 즐비하게 펄럭인다. 살아서 갈아먹던 논과 밭, 그 속에 몸을 부리며 만들었던 꿈은 얼마 있지 않아 최소한 이 고향에서만큼은 꿀 수 없게 됐다. 만장은 이승과 저승을 이어줄 뿐만 아니라, 저 다리(橋)가 걸음을 연장시켜주듯이 누에처럼 사람의 마음 속엣것을 길게 뽑아올린 것이다. 펄럭이는 만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백로야 왜가리야 강변 살자.” “바람아 강물아 내 동무야.” “조상 때부터 살아온 고향 어디간들 잊힐리요”
마을은 사람들로 북적댄다. 맨 처음 눈에 들어오는 것은 흙벽에 붙은 이색 사진들. 집집마다 서랍과 장롱에 묵혀둔 빛바랜 사진첩을 꺼내 보여주고픈 몇점씩을 골라 내놓은 것들이다. 사진의 제목들은 댁호다. 호동댁 사람들, 송암댁 사람들, 이산댁 사람들, 하고댁 사람들, 영보댁 사람들, 관산댁 사람들, 장평댁 사람들…. 이 마을 36가구 중 아직 떠나지 못한 20가구의 오래된 세월들이다.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그 집 식구들의 역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관산댁’은 아들녀석의 벌거벗은 백일기념 사진이며, 부끄러움에 얼굴도 못 들고 찍은 결혼사진, 제주도에서 조랑말 타고 찍은 여행사진, 아들의 대학 졸업식 때 아들의 사각모을 쓰고 자랑스럽게 웃는 모습, 그리고 덕산마을 사람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을 내놓았다. 사진의 뒤풍경은 서러움과 기쁨과 노여움이 함께 범벅이 된 지난날의 인생사였을 것이다. 덕산마을 사람들은 지금, 그 모든 한평생을 물에 잠기게 버려두고 떠나야만 하고 그 떠남을 위한 잔치를 한다. 서러운 축제다.
자식들이 자신을 어떻게 취급할까…
저녁 7시30분. 진혼굿이 열리기 전 마을 사람들은 마지막 회한의 흥을 쏟아냈다. 누구에게나 한곡쯤은 18번이 있다. 그 노래의 사이사이, 간간이 쏟아내는 하나하나의 이야기는 지금 그들의 심사가 어떤지를 드러낸다. “나는 여기서 뜨면 아들 있는 인천에 가서 살아야 하는디. 정말 가기 싫어라. 여기서는 나 맴대로 비누도 한 박스, 소주도 한 박스씩 사놓고, 쓰고 싶을 때 쓰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자유스러운디. 인천 가면 며느리 시중받으면서 어떻게 그리 살겄소. 다른 것은 겁 안 나는디 아이들 눈치보고 살 일이 죽기보다 못하겄다는 생각뿐이요.” 입이 건 하고댁 할머니였다. 이곳 사람들의 걱정거리는 하나같이 이주 뒤 어떻게 살 것이냐였다. 광주로, 서울로 간 자식들과 함께 산다는 일이 걱정거리 중 걱정거리였다. 돈걱정도 걱정이지만, 벌어먹고 살 걱정도 걱정이지만, 정작은 자식들이 자신을 어떻게 취급할까가 가슴에 묵직하게 얹혀 있었다. 문씨 제각의 빈 제지기 집에 설치한 사진작가 마동욱씨의 수몰반대투쟁 비디오테이프를 벌써 한 시간 넘게 보던 이정자(66)씨와 이씨의 시어머니 김선례(94) 할머니. “오래 살다본께 별 봉변을 다 당하요. 저의 어머니는 평생을 여기서만 살았어요. 내가 시집 올 때 벌써 남편 잃으시고, 모자지간만 살았어요. 피붙이라고 없응께 이 동네 사람들이 가족이나 마찬가지요. 정말 꿈인가 생시인가 모르겄소.” 이정자씨는 자신보다 시어머니 걱정이 컸다. 김선례 할머니는 귀가 어두운데다 도시라곤 구경해본 적도 없는데 사방이 꽉 틀어막힌 아파트에서 어떻게 살지 벌써부터 걱정이 태산이다. 또 한 사람, 수몰로 인해 가슴에 멍이 든 문난심(82) 할머니. “문재풍이라고 동생이 있는디. 전쟁 전에 찬탁이니 반탁이니 심할 때, 명문 광주 서중, 일고 다닌 그 동생이 찬탁에 관여했다가 행방불명되었지요. 그러구마는 전쟁이 나도 돌아오지 않았고, 지금껏 소식이 끊겨버렸어.” 반탁주의자에 의해 죽임을 당했는지, 아니면 월북을 했는지 생사조차 확인할 길이 없지만 혹여 북쪽에 살아 있다면 통일 뒤 물에 잠기고 만 고향집을 어떻게 찾아올 것이냐는 넋두리였다. 밤새, 떠도는 망자와 살아있으면서도 떠돌아야 할 자신들을 위한 진혼굿이 마을앞 당산나무 앞에서 벌어졌다. 무당 김혜연씨가 굿을 주도해갔다. 제를 지내고 있는 당산나무는 어떻게 될까. 마을 이장 한재희씨는 장흥 조경업자인 모씨에게 450만원에 팔린 상태라고 말한다. 수몰은 단지 사람의 집과 가재도구와 추억만이 묻히는 게 아니다. 마을을 가로지르며 뻗은 시냇가 빨래터도, 수수밭도, 고추밭도, 탱자 울타리도, 고샅을 향해 컹컹거리던 누렁이의 소리도, 풀벌레 소리도, 어르신 기침 소리도 다 물에 잠기고 말 것이다. 그 모든 역사와 혼의 씻김을 위해 쇳소리 뜨겁고, 북소리는 가슴을 요동치며, 곡소리는 하늘에 닿고 있었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25일은 두레박질하기, 흙담쌓기, 장승깎기, 벽화그리기, 가마솥밭 해먹기 등 함께 할 수 있는 체험행사로 막을 열었다. 장승깎기 행사에 참여한 윤보열(76)씨. “아들한테 가지는 않을 것이요. 내가 가면 얼마나 불편할 것이요. 보상금으로 경기도에다 한평짜리라도 땅 얻어서 농사 지을랍니다. 그러고 자식들은 주말에나 한번씩 왔다가라고 할 참이요.” 모두들 떠난 뒤의 삶이 조금씩은 두려운 모양이다. 흙담쌓기에 나온 유산댁. 관절이 아프지만 맨발로 흙 비비는 솜씨는 남달랐다. 영부댁, 박실댁, 영광댁도 질세라 푹푹 빠지며 흙담에 쌓을 흙을 비빈다. 곧 있으면 허물어질 집의, 그 집의 담장을 다시 쌓는 것이다. 삶은 아직 끊나지 않았고, 몇달 아닐지라도 덕산마을의 삶은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호균/ 시인 cckh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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