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섹션 : 사람과 사회 | 등록 2001.10.10(수) 제379호 |
[사람과사회] “형은 장애인인 걸 즐기네?” 장애인들이 만들어가는 장애인 잡지 <열린지평> 식구들의 아름다운 당당함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내놓고 차별하는 잡지가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역차별하는 잡지이다. 계간 <열린지평>은 장애인 필자에게만 원고료를 주고 비장애인 필자에게는 원고료를 주지 않는다. 필자 대부분이 장애인이니, 사실 떼먹는 원고료는 그리 많지 않다. <열린지평>의 상근자들은 운전과 발송일을 맡아 하는 총무 김희철(33)씨만 빼고 모두 장애인이다. 기자 윤두선(39·지체 일급)씨, 수습기자 오성환(33·뇌성마비 일급)씨, 전산팀 김동수(33·뇌성마비 일급)씨. 기자들이 양손을 잘 쓸 수 없는 탓에 사진은 자원봉사자 학생이 찍지만, 기획·섭외·취재·원고완성까지 오롯이 장애인들의 몫이다. 잘 나서지 않으려는 장애인들을 지면에 끌어내는 일도 쉽지 않지만 취재하고 돌아와 한자한자 독수리타법으로 글자를 쳐서 기사를 완성하는 과정도 어렵다. 그러나 이들은 이 모든 것들을 수준급으로 해내는 프로다.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 로터리 안국빌딩 11층이 이들의 둥지이다. 창 밖으로 인왕산부터 북한산까지 훤히 내다보인다. 추석 연휴가 지나고 수습기자 오씨는 출근을 못했다. 휠체어를 타고 가다가 자동차에 부딪혀 병원에 입원해 있는 중이다. 휠체어 장애인들은 항상 사람을 올려다봐야 하는 심리적인 불편도 불편이지만, 이런 터무니없는 사고를 당하는 일도 종종 있다. 휠체어가 낮다보니 운전자 시야의 사각지대에 놓이는 것이다. <오체불만족>의 지은이 오토다케의 휠체어가 그리 높은 것도 이 모든 것을 감안한 것이다. 물론 엄청 비싸다.
기자의 장애에 취재원이 놀란 사연
사무실은 여느 사무실과 큰 차이가 없었다. 한쪽 구석에 침대가 놓여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윤씨는 “콩가루 조직이라 하실지 모르겠지만, 간간이 쉬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는 우리에게는 컴퓨터만큼이나 중요한 작업 도구”라고 말한다. 11월부터 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하느라 바쁜 전산담당 김동수씨는 대화가 어려울 정도로 말하기에 힘을 들이고, 수습기자 오성환씨는 취재하러 갔을 때 같은 장애인인 상대방이 화들짝 놀랄 정도로 장애 정도가 심하다. 방 안에 들어가면 앉지 못하고 누워서 이야기해야 한다. 맏형격인 윤씨는 지난해 초 <한겨레> 지면을 탄 일이 있다. 연세대 인문학부를 졸업하던 때였다. 골방에만 박혀 지내던 그는 서른 중반에야 세상으로 나섰다. 서른네살에 초등 과정을 시작으로 중등·고등과정 검정고시를 거친 뒤 전동휠체어를 타고 4년 대학생활까지 성공적으로 마쳤다. 당시의 기사는 한 만학장애인에 대한 스포트라이트였다. 졸업과 함께 그는 곧장 <열린지평>의 수습기자로 취업했고, 그때 <한겨레21>과의 인터뷰는 “제대로 기자 생활을 할 때쯤”으로 잠정 미뤄졌다. 1년 반이 지난 지금 그는 어엿한 수석기자다. 이번 가을호에 그가 쓴 기사는 표지인물이기도 한 꼬마 세진이의 이야기와, 인천국제공항 현장르포. 대전에 사는 세진이는 두 다리가 플라스틱이지만 뜀박질도 열심히 하고 한달에 한번씩 검진받으러 서울에 올라올 때도 씩씩하다. 세진이의 바람은 무겁고 뻑뻑한 플라스틱 다리를 무릎꿇어도 안 아프고 가벼운 최첨단 의족 티타늄으로 바꾸는 것이란다. 지난 4월 미국에서 날아와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시구를 했던 아담(한국명 오인호)의 다리처럼 말이다. 인천공항 현장르포는 몇날며칠이 걸렸다. 공항버스의 리프트는 비교적 잘돼 있으나 곳곳에 산적한 온갖 턱들 때문에 이동이 쉽지만은 않았다. 장애인 식수대는 낮게 설치돼 있지만 안내 데스크는 턱없이 높아 휠체어를 타고는 도무지 안내를 받을 수 없다. 이런 크고 작은 불협화는 장애인 이용자의 처지에서 꼼꼼하게 설계했다기보다 눈에 보이는 몇 가지 것들을 따다놓은 탓이라는 게 윤씨의 결론이다.
꿈에서도 휠체어 타야 장애인
94년부터 객원기자로 활동해왔던 윤씨는 “몇년 사이에 세상은 바뀌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장애인들의 의식은 무척 많이 바뀌었다”고 말한다. 이번호에 특보로 실린 ‘안국동 로터리 횡단보도 소식’을 보자. 인사동 들머리에서 안국동으로 건너가려면 높다란 육교를 건너야 했다. 이 육교 코앞에 이들의 사무실이 자리한 안국빌딩이 있다. 인사동쪽에서 이곳을 찾아오려는 휠체어 장애인이라면 경복궁이나 계동까지 가서 빙 돌아오거나 아예 방문을 포기해야 했다. 거꾸로 인사동쪽에 있는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 사무소도 이쪽에서는 머나먼 곳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높다란 턱, 육교는 이제 사라지고 시원스레 횡단보도가 그어졌다. 윤씨는 “참여연대도 하지 못한 일을 우리가 해냈다”고 자랑한다. 필자이자 독자 박종태(43)씨의 힘든 싸움이 밑거름이 됐다. 3년 전부터 박씨와 그의 장애인 친구들은 관할구청과 경찰서 등에 탄원할 때마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는 반응을 접해야 했다. 박씨는 “내 몸이 뼛가루가 되는 한이 있어도”라는 말을 남기며 매번 무단횡단이라는 온몸시위를 벌였고, 기회 닿을 때마다 글을 써서 이 사실을 알렸다. <열린지평>의 기자와 필자들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섭외다. 나서지 않으려는 이들을 설득하는 것이야 이골이 났지만, 사람들이 ‘뭐 또 뜯어먹으려는 거 아닌가’ 하는 경계반응을 보일 땐 맥이 탁 풀린다고 한다. 얼마 전 노르웨이에서 라면을 팔아 성공한 한 인사를 만날 때(그도 어린 시절 치료를 받기 위해 노르웨이로 건너간 장애인이다), 그의 책을 펴낸 출판사쪽의 짧은 당부는 “너무 무리한 부탁은 하지 마세요”였다. 이젠 너무 익숙해졌지만, 그런 반응을 장애인에게서도 접할 땐 아주 씁쓰레하다. 이런 마당에 유명인을 섭외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이다. 윤씨에게 가장 인상적인 연예인은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궁예 역을 맡았던 김영철씨. 애꾸눈으로 나오는 그를 만나고 싶다는 독자들의 성화에, 혹시나 하고 메니저에게 청해봤으나 단칼에 거절당했다. 김영철씨가 한창 뜰 때였기에 하루에도 수십건씩의 인터뷰가 잡혀 있어 도무지 시간이 없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김씨와 직접 연락이 닿았다. 김씨는 잡지의 성격과 기획의도를 듣고 군말없이 1시간 동안 인터뷰에 응했다고 한다. 클론의 멤버 강원래씨도 만나보고 싶지만, 한동안은 미뤄야 할 것 같다고 한다. 불의의 사고로 중도 장애인이 된 이들이 자신의 장애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데는 최소한 몇년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윤씨는 “최소한 꿈에서도 휠체어를 탈 때 드디어 장애인이 된다”고 말한다. 의식적으로 자신이 장애인임을 인정한다 해도, 꿈속에서 여전히 뛰어다닌다면 무의식으로는 장애인임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윤씨가 나서지 않으려는 장애인들을 섭외할 때 하는 말은 이것이다. “그래요, 우린 장애인이에요. 많이 불편해요. 죽고 싶도록 괴로워요. 하지만 그게 우리의 죄는 아니죠. 왜 꽁꽁 숨어 있나요. 나와요. 햇볕 아래로.”
“우린 우리의 목소리를 원한다”
<열린지평>은 여느 잡지처럼 광고료와 구독료에 의존한다. 발행인과 운영위원들은 대부분 여고동창인 아줌마들. 88장애인 올림픽 때 봉사활동을 나갔다가 이른바 선진국 장애인들의 밝은 표정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졌던 이들은 장애인은 온정의 대상이 아니라 연대의 대상임을 깨달았다. “밥해다줄 생각 말라. 우리는 돼지가 아니다. 우리도 우리의 목소리를 내고 우리의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절절한 육성을 듣고 나서 창간 준비에 들어가, 93년 정기간행물로 등록시켰다. 그 다음부터는 광고만 빼고 모든 책임을 장애인들에게 넘겼다. 정기구독료(1년 1만원), 찬조회원료(1년 10만원), 평생회원료(20만원)로 꾸려가지만 아직 적자를 내지 않아 봤다는 게 <열린지평> 식구들의 자랑이다. “형은 장애인인 걸 즐기는 것 같아요.” 윤씨를 알고 지내던 비장애인 친구들이 그에게 자주했던 말이다. 윤씨는 “긍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정할 문제도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장애인이 장애인임을 인정할 때 세상이 바뀐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끝내고 인사동으로 밥을 먹으러 갔다. 하지만 낮은 탁자가 비어 있는 밥집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윤씨가 말했다. “방으로 가자. 턱이 높으면 업혀 들어가서라도 먹자.”
글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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