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섹션 : 사람과 사회 등록 2001.05.02(수) 제357호

[사람과사회] 주체사상, 대놓고 말하자

비판만이 허락됐던 절대금기, 서울대 대토론회에서 ‘학문적 토론’의 가능성을 시험하다

한국만큼 촌극이 많은 사회가 있을까. 웃을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이념논쟁이나 색깔시비와 관련한 그것은 쓴웃음만을 안겨준다. 지난 3월 한완상 교육부총리가 ‘창발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데 대해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가 문제삼은 사건도 예외는 아니었다. 교총은 북한에서 이 단어를 많이 쓴다는 이유로 딴죽을 걸었다. 과학계에서도 이를 써온 지 오래이고, 경찰청 홈페이지에도 등장하는 단어라는 등의 반론이 제기되면서 논란이 사그라들었지만, 한글마저도 분단을 피하지 못한다는 현실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주체사상에 대한 양 극단의 편향

그렇다면 이런 상황을 그려보자. 새 장관이 한반도의 현대사를 기록하는 역사교과서에 북한의 주체사상을 소개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한국사회는 어떤 소용돌이에 빠져들까. 상상하기 어려운 매카시즘 폭풍이 일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한국사회에서 주체사상은 여전히 ‘칭찬할 자유는 없는 대신 비판할 자유만이 허락되는’ 절대금기의 대상이다.

주체사상에 대해 지금까지 남쪽이 보여온 태도에 대해 한 북한 전문가는 “야만적이었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주체사상이 북한을 읽는 키워드(열쇳말)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데도 우리 사회는 주체사상을 애써 무시하고 있다”며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주체사상은 이미 북쪽 사람들의 신념과 일상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그래서 “통일이란 5200만의 남쪽 ‘자본주의자’들과 2200만의 북쪽 ‘주사파’들의 결합”이라고 정리한다. 주체사상에 대한 진지한 이해 없이는 북쪽과의 대화나 통일이 애당초 불가능할 것이라는 얘기다.

주체사상에 대한 한국사회의 무지는, 아직도 주체사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에 대해 ‘반국가단체 고무·찬양죄’를 적용해 형사처벌하는 국가보안법의 실체와 무관하지 않다. 국가보안법은 주체사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실제보다 미화하거나 또는 폄하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왜곡을 확대재생산하는 장치로 작용해왔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한쪽에서는 1980년대 이래 남한사회 변혁운동의 지도사상으로 주체사상을 받아들인 이들이 주체사상의 문구에 집착해 북쪽의 경험을 남쪽에 그대로 이식하려 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관변학자들이 개인숭배와 부자세습을 강요하는 봉건왕조의 이데올로기라는 모범답안만을 만들어온 것이다. 이러다보니 주체사상이 북한사회에 끼친 영향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비교해보는 생산적인 연구는 실종돼버리는 악순환이 계속된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서울대 총학생회(회장 장종오)가 4월23∼24일 이틀 동안 서울대에서 연 ‘주체사상과의 유쾌한 대화, 주체사상 대토론회’는 주체사상에 대한 우리사회의 면역력을 시험하는 리트머스 종이로서의 구실을 톡톡히 했다.

‘최초의 역사적 실험’으로 불렸던 이번 행사는 분단 이후 첫 대중적 토론회라는 점에서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주최쪽은 △북에 대한 적개심 대신에 동포로서의 이해와 △‘배울 부분은 과감히 배우겠다’는 자세를 두 가지 시대가치로 제시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이번 행사를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이민규 부총학생회장은 “북한에 대한 무관심과 단편적인 지식을 넘어서서 그 근본에 접근하는 진취적인 연구가 절실하다는 문제의식이 있었다”면서 “그러나 애초 사회자와 토론자로 선정됐던 전문가들이 막판에 불참함으로써 역시 주체사상이 금기의 영역임이 다시 한번 드러났다”고 말했다.

토론자 3명이나 막판에 불참

토론자로 나서기로 했던 ‘노동당 2중대’ 발언의 주인공 김용갑 한나라당 의원은 토론회 사흘 전에 “국가보안법 개정 반대 입장을 가진 이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불참을 통보해왔고, 사회를 보기로 했던 아태평화재단 김근식 책임연구위원도 참석하지 않았다. 또 ‘주체사상은 개인숭배사상인가’라는 주제로 토론하기로 했던 정대연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정책위원장 역시 행사 당일 참석이 취소됐다.

총학생회 관계자는 “행사를 준비하면서 북한통으로 알려진 40여명의 전문가들을 상대로 참석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며 “특히 북에 대해 검증되지 않은 온갖 정보를 흘려왔던 <조선일보>의 조갑제 기자가 ‘주체사상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하면서 참석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삼척동자가 웃을 일”이라고 주장했다. 보수나 진보를 막론하고 주체사상이라는 주제가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부담스러운 것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200여명의 학생들이 참여한 첫날 토론회에서는 ‘주체사상이 북한사회에 미친 영향’(고려대 김형찬 교수), ‘주체사상은 어떻게 형성·발전되었는가’(동국대 강정구 교수), ‘주체사상은 금기시되어야 하는가’(민주노동당 최규엽 자주통일위원장) 등 3개 주제로 토론이 진행됐다. 이날 언론은 주최쪽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썼다는 <주체사상에 대하여>라는 북한의 주체사상 관련 공식문건이 사전토론자료 가운데 하나로 뿌려졌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춰 보도했다. 국가보안법 위반 여부에만 관심을 보인 셈이다. 물론 주최쪽이 사전배포한 자료에는 “주체사상이 북한식 개발이데올로기”라는 시각에서 비판한 글들도 포함돼 있었다. 이같은 지적 때문인지 경찰·검찰 등 수사기관은 주최쪽에 대해 국가보안법을 적용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강정구 교수는 토론에서 “북한의 사회주의 건설과정에 대한 이해없이 주체사상의 거대일반이론 내용만 강조해 ‘철학적 원리’ 등 자구 하나하나에 매달리는 분석철학적 방법론으로 주체사상을 분석·비판하는 것은 일면적 접근”이라고 비판했다. 역사적 맥락과 현실적인 의의를 중심으로 한 역사주의 분석방식이 유용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주체사상이 북한사회 건설과정의 특징이나 성격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또 최규엽 위원장은 “주체사상은 학문적 토론과 연구의 대상이지 형사처벌의 대상은 아니다”며 “주체사상의 지지 여부를 떠나 주체사상의 이론과 방법론을 과학적인 자세로 연구하고 객관적으로 토론할 수 있으며 주체사상의 장점들을 남쪽에서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을 범죄로 보지 않는 그런 시대가 빨리 와야 한다”고 지적했다.

비슷한 토론회 계속 이어질 듯

이에 비해 김형찬 교수는 “시대가 바뀌고 사회조건이 변화했는데도 30여년 전에 발달한 사상을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과제는 자기가 만든 주체사상을 수정해 북한의 사정에 맞는 통치이념을 세우고 주민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토론은 애초 주최쪽이 의도했던 것만큼 치열하게 이뤄지지는 않았다. 사회를 맡았던 김창수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정책실장은 “국가보안법의 존재를 의식한 참석자들이 발언의 수위나 내용을 조절한다는 느낌을 받았다”면서 “일종의 ‘자기검열’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토론회를 계기로 주체사상의 내용과 북한사회에 끼친 영향에 대해 엄밀하게 연구해야 한다는 지적도 잇따라 나오고 있다. “탈북자들을 만나보면 주체사상의 이론을 외우지는 못하지만 주체사상이 내세우는 바를 체험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아요. 더러 남한 사람들이 왜 그렇게 배알도 없고 줏대도 없느냐고 하는 말도 그런 표현의 하나죠. 북한 사람들에게 주체사상은 라이프 스타일이자 문화이며 삶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죠. 동유럽과 소련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버티는 것 등을 보면 주체사상이 대중적인 합의나 통합력을 지니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이에 대한 연구도 필요합니다.” 김근식 아태평화재단 책임연구원의 말이다.

이종석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북한에서는 주체사상이 철학개념상의 사상과 김일성주의·김정일주의 등으로 이원화돼 있다”며 “이에 대한 공론화와 학문적 토론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세계사에 유례없는 자주국가의 구성원들이 어떤 체제보다 피동적인 존재로 변했다는 것은 주체사상이 권력의 담론으로 변질돼왔다는 것을 의미한다”면서 “이런 점에서 주체사상의 문제점에 대한 고찰도 필수적”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서울 시내 일부 대학에서 이번 토론회와 비슷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어 주체사상에 대한 대중적 논의가 대학사회를 중심으로 더욱 확산될 전망이다.

글/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사진/ 이용호 기자 y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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