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섹션 : 사람이야기 | 등록 2001.12.26(수) 제390호 |
[사람이야기] 인술 베풀며, 그림 그리며… “책 제목이 뭐였더라…. 잘 기억이 나질 않네요. 93년이었는지 94년이었는지도 희미하고….” 이상훈 교수(중앙대 의과대)는 기억의 실타래를 풀지 못했다. 그렇지만 지금도 그 책에 담겨 있던 내용만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바쁜 일상의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그를 온통 흔들어놓았던 책이었기에. “하루하루 시력을 잃어가는 한 소년의 얘기였습니다. 급기야 어느날 이 소년은 꼭 한달 뒤에 실명하게 된다는 충격적인 진단을 받게 됩니다.” 소년에게 세상은 점차 빛을 잃어간다. 그런데도 소년은 실명으로 치닫는 자신의 처지에 절망하기보다 지금껏 밝은 눈을 가졌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태도를 보인다. 절망으로 시간을 보내는 대신 일분일초가 아깝다는 듯 세상의 아름다운 모습을 눈동자에 담는 데 혼신을 다하는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이 교수는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정말 눈물이 날 만큼 감동적이었다”고 술회했다. 교회에서 늘 들어왔던 ‘범사(凡事)에 감사하라’는 말이 그때처럼 절실했던 적이 없었다고 한다. 사지 멀쩡하게 걸어다니는 게 절체절명의 축복이란 절감은 자연스럽게 불치병에 걸렸거나 소외된 아이들을 위해 살자는 결심으로 이어졌다.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해 10년 가까이 교회 유치부 선생을 할 정도로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던 천성에선 그다지 어렵지 않은 결심이기도 했다. “병원에서 일하다보니 정상적이고 밝은 애들보다는 아픈 아이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아이들에 대한 생각이 좀 다를 수밖에요.” 이 교수는 95년 뜻맞는 이들과 국제의료봉사단체인 글로벌케어를 꾸렸다. 이 단체는 현재 약 2천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으며 북한, 몽골 등에 인술을 베풀고 있다. 제3세계 어린이와 후원국의 양부모를 일대일로 맺어주는 국제어린이후원단체 플랜코리아(옛 양친회, www.plankorea.or.kr, 02-3444-2216) 활동에도 열심이다. 이 교수는 개인적으로 아프리카 오지 탄자니아 어린이 ‘존’을 후원하고 있다. 한해가 저물어가던 12월18일 이 교수는 또 하나의 조그만 ‘사건’을 만들었다. 서울 인사동 조형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연 것. 취미생활로 틈틈이 그려온 미술작품 150점을 이날 선보였다. 불치병 어린이, 소외 아동들을 돕는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일’을 벌였다고. 새해 1월 말 그는 의료봉사 활동을 위해 칠레로 떠날 계획이다.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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