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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경제 등록 2003.04.23(수) 제456호

[경제] 그는 박현채가 그립다

관료출신 아버지의 세 가지 충고 다 못 지켜… 정부 일 끝나면 방송 일 다시 하고파

정태인씨를 처음 만난 것은 외환위기 이후 우리 경제가 극도로 침체에 빠져 있던 1998년 여름이었다. 당시 민간연구소인 한국사회과학연구소의 연구원이던 그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고금리 긴축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해 관심을 끌었다. 외환위기 전 그는 아내가 공부하던 영국의 한 대학에 객원 연구원으로 건너가 있다가, 환율이 폭등하는 바람에 돈이 없어 되돌아왔다고 했다. 5년 만에 그를 다시 만나 “주름이 많이 늘어난 것 같다”고 했더니, “애초 많았다”고 얼버무렸다. 어쨌든 주름이 훨씬 선명해진 것은 분명했다.

사람들이 그를 흔히 ‘정 박사’라고 부르지만, 사실 그는 박사학위를 받지는 못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그는 ‘박수’(박사과정 수료)다. 수료한 지 이미 10년이 넘어 논문 낼 자격이 없어졌는데, 지난해 서울대에서 등록비로 30만원을 내면 일단 논문 낼 자격을 살려준다고 했다고 한다. “300만원을 내고 강의를 들으라고 해서, 돈 때문에 포기했어요.” 그는 이제 다시 직업적인 학자의 길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에서 할 일이 끝나면 방송 일을 다시 하고 싶다고 했다.

그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게 되자, 관료 출신인 그의 부친은 세 가지 충고를 했다. “술 많이 마시지 마라, 인사 잘해라, 관료들과 부딪치지 마라.” 그는 “인사 잘하는 것밖에 지키지 못했다”며 웃었다. 서울 세종로 청사 근처의 한 카페에서 4월19일 오후 3시에 시작된 인터뷰는 맥주를 시켜놓고 시작됐다. 저녁식사 때는 소주가 곁들여졌다. 기사 마감에 쫓기지 않았다면 아마 새벽까지 그와 술을 마셨으리라.

그는 서울대 78학번으로 정운찬 현 서울대 총장이 서울대에서 첫 강의를 맡았을 때 학생이었다. 정 총장은 지금도 78학번에 가장 애정이 많다고 한다. 요즘도 그는 정 총장을 자주 만나뵙는다. 그가 직속상사로 모시고 일하는 이정우 정책실장이나 인수위 경제2분과 간사위원이던 김대환 교수는 ‘학현(변형윤)학파’ 1.5세대로 분류된다. 하지만 그는 조순-정운찬 학맥이나 변형윤 학맥보다는 박현채 선생에게 더 많은 영향을 받은 듯했다. “박현채 선생님 평전을 누군가 써야 할 텐데, 제대로 자료 정리를 못해놓은 것 같아 걱정”이라고 그는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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