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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교육은 돈 버는 교육? 최근 10대를 대상으로 한 경제교육 유행…노동과 일의 가치보다 부자되는 법에만 초점 맞춰
지난 4월17일 오전 서울 마포구 염리초등학교 5학년 5반 교실. 2교시 수업이 시작됐다. 그런데 교단에 선 사람은 담임선생님이 아니다. 삼성생명에 다니는 국좌호(31) 대리가 이 교실을 찾은 게 벌써 세 번째. “아저씨, 아니 사장님∼.” 5반 어린이 30여명이 모두 친숙한 삼촌처럼 그를 맞는다. 사장님? 지난주에 기업활동을 가르쳤는데 수업 중에 국씨가 사장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국 대리는 국가경영전략연구원의 무료 청소년 경제교육 프로그램인 ‘주니어 어치브먼트’(JA·Junior Achievement)의 자원봉사 강사다.
‘재미있는’ 경제수업의 풍경
“여러분은 볼펜 만드는 회사인 ‘좌호공장’ 직원이에요. 자, 볼펜은 이렇게 만들어집니다.” 국 대리가 볼펜 심을 꺼내 스프링을 넣은 뒤 볼펜 몸통을 끼웠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자꾸 몸통이 빠져나온다. “에∼.” 아이들의 장난스런 웃음이 교실을 휘젓는다. “원래 사장은 만드는 법을 몰라.” 한 아이의 말에 다들 또 한번 까르르 웃는다. 어렵사리 볼펜 몸통이 끼워지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감탄사를 연발한다. “우∼ 와아∼.” JA 경제교육은 내내 ‘재미있게’ 진행됐다. 잠시 뒤 아이들이 대량생산팀과 단위생산팀으로 나뉘어 직접 볼펜 조립생산을 시작했다. 그런데 뜻밖의 문제가 생겼다. 아이들끼리 협동생산이 제대로 안 된 탓인지 1분 동안 단위생산팀이 대량생산팀보다 더 많은 볼펜을 조립해낸 것이다. 국 대리가 재치 있게 설명한다. “볼펜처럼 제작공정이 짧고 단순하면 단위생산이 더 많이 생산할 수도 있어요. 컴퓨터·자동차처럼 복잡한 것을 만들어낼 때는 대량생산이 훨씬 더 많이 만들어냅니다.” 수업이 끝난 뒤 이예진(12)양이 새침스럽게 수업소감을 밝혔다. “저는 여자 축구선수가 꿈이에요. 그래도 경제는 알아야 하잖아요. 볼펜 만들기를 하니까 산수나 국어보다 더 재미있어요.” 10대 경제교육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방학뿐 아니라 학기 중에도 여기저기서 각종 경제교육 캠프가 열린다. 미래 고객인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장사(마케팅) 차원이기도 하지만, 기업체 및 금융기관마다 앞다퉈 중·고교 방문 경제교육에 나서고 있다. 언론들도 경제신문을 중심으로 조기 경제·금융 교육을 역설한다. 10대 경제교육 열풍은 봇물처럼 터지는 어린이 금융상품을 한눈에 보여준다.
어린이 금융상품도 날개 달아
JA는 기업활동과 시장경제원리 체험을 통해 ‘합리적인 부의 축적’을 가르치는 국제적인 청소년 경제교육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JA와 달리 상당수의 10대 경제교육은 ‘부자아빠, 부자엄마’로 키우는 데 집중되고 있다. 일찍부터 돈을 사랑하는 어린이로, 나아가 정주영, 잭 웰치 같은 최고경영자(CEO)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경제감각을 익혀야 한다고 말하지만 뜯어보면 돈 버는 일에, 사장님 되는 길에 일찌감치 눈 뜨게 하는 교육이 주류를 이룬다. 국가경영전략연구원 최병미 연구원은 “JA 프로그램에 대한 보도가 나간 뒤 우리 아이한테 경제 과외수업을 해줄 수 있느냐는 학부모들의 문의가 잇따르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2월, 어린이 경제교육을 표방한 캠프이데일리가 LG투자증권으로부터 의뢰받아 개최한 경제캠프의 테마는 모의주식투자게임. LG투자증권의 VIP고객 자녀들만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이다. 캠프이데일리쪽은 “커서 멋모르고 주식투자했다가 망하는 사람도 많다. 어릴 때부터 어떻게 주식에 투자하고 돈을 불려야 하는지 투자의 자세를 가르치는 교육”이라고 말했다. 캠프이데일리는 지난 1월 ‘21세기 퍼스트 클래스, 1% 경제리더 양성’을 내걸고 초등학교 4, 5, 6학년을 대상으로 2박3일 벤처경영캠프를 연 데 이어 올 여름방학에는 금융투자캠프를 차릴 예정이다. 이미 초베스트셀러로 자리잡은 어린이 경제동화책 <열두살에 부자가 된 키라>가 단적으로 보여주듯, 각종 10대 경제교육은 아르바이트로 돈 벌고 주식투자하면서 부자되는 이야기가 대다수다. 주간 <어린이경제신문>에 연재 중인 ‘13살 성원이의 주식투자기’를 보자. 성원이는 한꺼번에 주식 30주를 사려다 10주씩 나눠 매입한 덕에 손해를 줄일 수 있었다는 자신의 실제 경험을 풀어놓았다. 성원이는 저금한 용돈 10만원에다 엄마한테 새로 받은 50만원을 밑천삼아 주식투자에 나서고 다른 어린이들의 투자까지 대행해주는 펀드매니저로 활약한다. <어린이경제신문> 박원배 대표는 “성원이는 자기 또래에서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쁜 아이다. 중학교 3학년인 예담이는 우리 신문에 ‘나는 돈이 좋아’라는 글을 써왔는데 곧 책으로 묶어 펴낼 예정”이라고 말했다.
“경제교육도 과외 필요”
물론 건전한 경제시민으로 키우기 위한 경제교육은 더 많을수록 좋다. 부모들이 공부 잘하고,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는 것만이 미덕이라고 여겨온 탓에 10대 경제교육이 빈곤한 것도 사실이다. 돈은 ‘내 꿈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일 수 있고 가치 있게 벌고 쓰는 법도 가르쳐야 한다. 돈을 ‘돌’같이 여기라는 말은 가치판단과는 별개로 자본주의 ‘현실’과 동떨어진 얘기다. 그러나 돈과 친해지도록 만드는 조기 금융교육은 필요하지만, 오직 ‘부자 되고 사장님 되는 습관과 요령’을 길러주는 이야기로 가득 찬 지금의 경제교육은 일그러져 있다. 지난 4월18일 오후 인천시 동구 화도진 도서관. 초등학교 3학년 60여명이 <어린이경제신문>이 주최하는 ‘경제와 놀자’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있었다. 이번 경제놀이 코너는 ‘찾아라, 공통점’. 왕자를 만나려고 자신의 목소리를 마녀한테 주고 두 다리를 얻는다는 인어공주 이야기와 아버지를 눈 뜨게 하려고 바다 속에 자기 몸을 던진 심청 이야기를 통해 ‘기회비용’ 개념을 배우는 코너다. 아이들은 △주인공이 여자다 △불쌍하다 △무엇을 얻은 대신 무언가를 잃었다는 등 두 이야기의 공통점을 저마다 쏟아냈다. “이 동화에 왜 우리가 경제를 배워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들어 있어요. 여러분들이 잘 말했듯, 인어공주나 심청이나 뭔가를 얻고 싶을 때 다른 뭔가를 잃게 되죠. 경제는 선택이에요.” CEO 명찰을 단, 프로그램 진행자인 박원배 대표가 차근차근 설명했다. 이어 ‘나는 동물원 사장’ 코너에서는 호랑이, 유모차, 햄버거 가게 등을 동물원 안에 어떻게 잘 배치하면 더 많은 손님을 끌 수 있는지, 즉 기업가 시각을 키우는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이에 대해 한국개발연구원(KDI) 천규승 경제교육팀장은 “기업의 이윤을 늘리는 길은 어릴 때 안 가르쳐도 나중에 다 안다. 모의주식투자게임 같은 이벤트 교육의 경우 딱딱한 경제를 재미있는 체험을 통해 배울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교육 흉내만 낼 뿐 게임과 놀이 그 자체에 그치고 마는 게 대다수”라고 꼬집었다. 이날 교육실 뒷자리에 앉아 지켜보던 학부모 강아무개(45·인천 남구)씨는 “아무래도 경제교육을 일찍 접하면 부자로 크고 사장도 되는데 조금 낫지 않겠어요”라고 말했다. 강씨는 “영어·수학처럼 경제교육 과외도 필요해요. 돈 많은 부자들은 아이를 기업가, 부자아빠로 키우려고 벌써 과외수업을 시키고 있다”고 귀띔해주듯 말했다. 강씨의 말마따나 ‘어린이 비즈스쿨’과 ‘키라경제캠프’를 운영 중인 아이빛연구소는 상경계열 대학(원)생 150여명을 동원해 조만간 경제 과외수업 사업을 본격화하기로 했다. 아이빛연구소쪽은 “그룹별로 아이들을 모아놓고 경제 과외교습을 해달라는 학부모들의 제안과 요청이 많았다. 곧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가정 방문 경제학습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부자 콤플렉스 탓인지 각종 경제교육이 경제현실 이해보다는 돈 버는 과외공부로 가고 있다. 아동 노동이 금지돼 있는데도 돈과 친해지게 한다는 이유로 아이들한테 전봇대에 광고 전단지 붙이는 아르바이트를 시키는 게 과연 바람직한 것이냐.” 한국개발연구원 천규승 팀장의 지적이다.
중구난방으로 이뤄진다는 문제도
경제교육의 방향조차 딱히 잡힌 틀이 전혀 없다. 청소년 경제교육 제1장에 담을 내용은 백지상태나 다름없고, 어떻게, 어디까지 경제교육을 시킬 것인지에 대한 충분한 고민도 없다. 그저 학교는 학교대로 기업과 금융기관은 그쪽대로 경제교육이 중구난방으로 이뤄지고 있다. 국민은행 금융교육팀 박철 전문위원은 “금융교육에 대한 관심은 높지만 교재와 강의 프로그램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여기 저기서 우후죽순으로 경쟁적으로 경제교육이 이뤄지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부자 되는 법’을 가르치는 게 꼭 비교육적이고 속물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각종 경제교육 프로그램을 보면 재테크와 CEO 자질만 강조할 뿐, 월급 받으면서 땀흘려 일하는 노동과 일의 가치를 가르치는 교육은 찾아보기 어렵다. 천규승 팀장은 “내가 비록 월급 받으려고 일하더라도 남들이 살아가는 데 쓰는 물건 만들고 세금 내면서 사회를 유지·발전시키는 데 기여한다는 점을 이야기해주는 교육은 빠져 있다”고 말했다. 아빠가 열심히 일해 번 월급 중 일부가 국가에 세금으로 나가고 그 세금으로 경찰이 치안을 유지하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 아빠의 일이 가족뿐 아니라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을 깨우쳐주는 게 진정한 10대 경제교육의 한가지 방향이라는 얘기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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