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경제인 ] 2002년04월03일 제403호 

정몽헌은 리허설 끝냈나

구조조정 도우미로 경영복귀 수순 밟아… 부실경영 꼬리표 떼기 위해 안간힘


사진/ 조용하게 경영 복귀를 준비하고 있는 정몽헌 회장. 구조조정을 마무리하면 정식으로 복귀 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 (한겨레)


무너진 현대 신화의 후계자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이 재기의 발판을 다지고 있다. 공중분해된 현대그룹 계열사들을 하나씩 추스르면서 경영 복귀의 채비를 서두르고 있는 것이다. 현대상선은 지난 3월28일 정기 주주총회에서 정몽헌 회장을 등기이사로 선임했다. 정 회장이 99년 말 현대상선을 떠난 지 2년3개월, 2000년 6월 그룹 회장을 그만둔 지 1년9개월 만에 현대그룹에서 공식적으로 경영활동을 재개하는 셈이다. 그는 지난 1년여 동안 그룹 경영에 관여하지 않고 현대아산의 대북사업에만 전념해왔다.

현대그룹 계열사 추스르기 시도

이사 선임의 명목상 이유는 구조조정을 돕기 위한 것이다. 현대상선 구조조정의 핵심인 자동차운송사업부문 매각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대주주인 정 회장이 책임있게 나서야 한다는 설명이다. 현대상선도 정 회장이 경영에 참여하지는 않을 것이며, 단지 구조조정 업무를 돕기 위해서 합류한 것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정몽헌 회장이 현대상선의 사실상 최대주주라는 점, 그리고 정 회장이 81년부터 99년 말까지 20년 가까이 현대상선의 최고경영자로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번 이사 선임은 예사롭지 않다. 구조조정을 완료한 뒤 본격적인 경영 복귀를 위한 수순으로 풀이된다. 현대 고위 관계자는 “자동차운송사업부문 매각을 성사시킨다면 현대상선의 구조조정이 일단락되는 만큼 정몽헌 회장이 경영에 복귀하는 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몽헌 회장의 측근들도 대열을 정비하고 있다. 정 회장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하던 강명구 구조조정본부 부위원장이 올해 초 현대택배 대표이사 부회장에 선임됐다. 이어 3월 말에는 현대엘리베이터와 현대종합상사 등기이사로 잇따라 선임됐다. 대신 지난 2000년 3월 ‘왕자의 난’ 때 중립적인 입장을 취한 현대종합상사 정재관 부회장은 상임고문으로 물러앉았으며, 강 부회장과 함께 정몽헌 회장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박원진 사장이 현대종합상사 대표이사 사장에 선임됐다. 현대엘리베이터·현대상선·현대종합상사·현대택배를 중심으로 정몽헌 회장의 경영복귀를 위한 체제정비가 시작됐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몽헌 회장은 현재 외부 행사에 나서지 않고 현대상선을 비롯한 계열사들의 구조조정을 내부에서 챙기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으로서 대북사업에 전념하고 있는 것으로 돼 있지만 실제로는 날마다 구조조정 관련 업무를 보고받고 이를 조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 회장은 실제로 아침 7시면 어김없이 현대 계동사옥 12층에 마련된 사무실로 출근한다. 그리고 구조조정본부 김재수 사장과 강명구 부회장을 만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계열사들의 구조조정 추진 현황을 보고받고 몇가지 업무를 지시하고 난 뒤 오후에는 주로 외부에서 활동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면에 나서지는 않고 있지만 이미 계열사들의 구조조정에 상당한 깊이까지 관여하고 있는 셈이다.

정 회장의 경영 참여는 물론 채권단의 양해와 묵인 아래 이뤄지고 있다. 현대상선을 비롯한 주요 계열사들이 유동성 위기에 몰려 있는 상황에서 채권단의 동의 없이 정 회장의 경영 복귀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현대상선의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은 지난해 10월 김충식 사장이 사임할 때만 해도 정 회장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당시 새로 취임한 장철순 사장에게 정 회장 측근들의 경영 배제를 강력히 주문하기도 했다. 부실경영의 책임이 있는 정몽헌 회장의 경영 복귀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보인 것이다. 산업은행이 이러한 기존 방침을 바꾸면서 정 회장의 복귀를 양해하고 있는 것은 현대상선의 경영 정상화가 가시권에 들어왔다는 판단 때문이다. 현대상선은 현재 추진하고 있는 2조원 규모의 자동차운송사업부문 매각이 성사될 경우 부채비율을 획기적으로 낮추는 것은 물론 유동성 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자동차운송사업 성공적 매각이 관건


사진/ 정몽헌 회장은 자동차운송사업부문 매각에 사활을 걸고 있다. (한겨레21)


현재 현대그룹은 현대상선을 주축으로 짜여져 있다. 물론 현대엘리베이터가 현대상선의 최대주주(지분 15.16%)지만, 현대종합상사·현대택배·현대아산·현대증권 등 주요 회사의 지분을 현대상선이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현대상선의 구조조정은 그룹 전체의 회생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건이라 할 수 있다. 현대그룹은 지난 2000년 현대자동차에 이어 2001년 현대건설과 하이닉스반도체(옛 현대전자)가, 지난 2월 말에는 현대중공업이 계열분리됨으로써 재계 순위 15위 안팎의 소그룹으로 전락한 상태다. 게다가 현대상선·현대종합상사·현대아산 등 주요 계열사들이 경영난으로 구조조정의 와중에 휩싸여 있다.

현대상선이 추진하고 있는 구조조정의 핵심은 15억∼18억달러 규모의 자동차운송사업부문 매각이다. 매각이 성사될 경우 2조7천억원의 일반 차입금 가운데 2조원을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물론 총부채는 6조원이 넘지만 나머지는 선박건조 과정에서 당연히 발생하는 선박금융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차입금으로 보기는 어렵다. 현대상선은 지난 3월 초 노르웨이의 빌 빌헬름센 ASA 및 스웨덴 발레니우스 라인스 AB의 합작사와 자동차운송사업부문 매각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이미 체결한 상태다. 본계약 체결을 위한 핵심 조건은 현대·기아 자동차와의 장기운송 계약. 대부분 연간 단위로 이뤄지는 운송 계약을 5∼8년의 장기계약으로 전환하면 사업부문 매각이 성사되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정몽헌 회장의 역할은 현대·기아 자동차와의 장기운송 계약을 이뤄내는 것이다. 실무선에서 협의를 하고 있지만 최종적인 결정은 정몽구 회장이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기아차는 특정 기업에 대한 지원이라는 비판을 의식한 탓에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아직 결정된 바 없다는 것이 회사 쪽 입장이다. 그러나 회사 안팎에서는 장기운송계약이 체결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본다. 어차피 연간계약으로 자동차 수송을 계속 담당해왔기 때문이다. 현대상선은 현대·기아차와 협의가 원만하게 진행되고 있어 4월 초 장기운송계약 체결에 합의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장기운송계약이 체결되면 매각 계약도 그리 어렵지 않게 이뤄질 전망이다. 따라서 현대상선의 자동차운송사업부문 매각은 정몽헌 회장의 경영 복귀 여부를 판가름하는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실무적인 문제는 남아 있다. 장기계약을 몇년으로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현대상선은 5년 이상을 요구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8년을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8년 계약은 현대·기아 자동차 입장에서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계약서 재작성도 과제다. 지금까지 현대·기아차와 현대상선의 운송계약은 2장짜리 계약서가 전부였다. 이전에 계열사였다는 이유로 권리·의무 관계를 분명히 하지 않고 대충 정리해놓은 것이었다. 따라서 사업부문이 제3자에게 매각되면 앞으로 발생할 분쟁에 대비해 계약서를 꼼꼼하게 처음부터 다시 작성해야 한다.

현대상선의 자동차운송사업부문은 그 규모에서 세계 2위 규모로, 연간 1조원의 매출에 1500억원의 순이익을 내고 있다. 현대상선 관계자는 “전 세계적으로 자동차운송사업 분야가 6개 회사의 과점체제로 이뤄져 있다”며 “따라서 현대상선 사업부문 매각은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험난한 여정에 여론의 역풍도 대비해야

정 회장은 경영복귀를 위한 수순이 여론의 역풍에 부딪힐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현대상선도 이를 의식해 정 회장의 이사 선임이 경영복귀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부실경영의 책임이 있는 대주주의 경영복귀에 국민의 눈길이 따가운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금강산 관광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현대아산 문제도 풀어야 할 숙제다. 남북대화 등 주변 여건의 획기적인 변화가 없는 한 당분간 개선을 기대하기도 힘들다. 현대증권을 비롯한 금융 3개사의 매각도 지지부진한 상태다. 이들은 형식상 계열사로 돼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현대그룹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다. AIG와의 매각협상 결렬로 어중간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현대그룹 정상화의 길은 아직 멀고도 험한 상황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재기를 위한 정 회장의 행보 역시 그룹 정상화 때까지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정남기 기자 jnam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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