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로비로 얼룩진 금융계 자리은행권 임원인사 둘러싼 막전막후 암투… 파벌과 지역안배는 물론 음모와 정략까지
“주총 끝난 다음에 사표내야 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어.” 지난 3월9일 조흥은행 정기주주총회에서 감사로 선임된 김상우 전 금융감독원 부원장보가 금감원 집무실에서 독백처럼 한 말이다. 그는 3월7일 사표를 냈다. 그가 지난 69년 한국은행에 입행한 이후 32년간 지켜본 은행권 인사는 주총날 뚜껑을 열어봐야 알 수 있는 이변의 연속이었는지 모른다. 올해도 은행권 임원인사는 한마디로 ‘정치’다. 로비와 줄대기, 파벌과 지역정서, 음모와 정략이 끼어든다.
이변의 연속, 틈새 비집고 들어온 변수들
지난 2월22일 열린 외환은행의 이사회를 보자. 이날 오전 외환은행 전 임원이 사표를 냈다는 소식이 한 인터넷 뉴스매체를 통해 퍼졌다. 홍보팀 사람들은 “왜 그런 얘기가 도는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밤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21일 밤 열린 금융기관최고경영자 연찬회에서 김경림 행장은 금융감독위원회 정건용 부위원장과 상당히 심각한 얼굴로 밀담을 나눴다. 정 부위원장은 다음날 무슨 얘기를 나눴느냐고 묻자 “김 행장이 은행임원 문제 때문에 애로가 많다고 해서 행장이 소신껏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고 말했다. 다음날 아침 외환은행 감사자리는 유임에서 교체로 바뀌었다. 임기가 끝난 허고광 감사는 1년간 더 자리를 지키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밤새 바뀐 것이다. 이렇게 되자 한국은행, 금융감독원, 수출입은행 등이 뛰기 시작했다. 한국은행과 수출입은행은 이 은행의 주주다. 금감원도 얼굴을 내밀었다. 다른 은행 감사자리를 양보받기 위해서라도 이들은 뛰어야 했다. 한국은행은 “외환은행 감사자리는 BOK(한국은행의 영문 약칭) 몫”이라고 고집했다. 중국출장 중인 박영철 이사회 의장이 귀국한 뒤 열린 심야회의에서 하평완 한국은행 은행국장이 신임감사로 추천됐다. 한국은행의 승리였다. 하 감사는 김대중 정부에서 급부상한 광주고를 졸업했다. 올해 은행 임원 인사의 백미는 금융지주회사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였다. 금융지주회사는 한빛, 평화, 광주, 경남은행과 하나로종금을 묶는 ‘은행 위의 은행’, 곧 ‘왕중왕’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지난 2월14일 공적자금이 투입된 금융지주회사 CEO를 선정하기 위해 인선위원회를 구성했다. 관심은 인선위원들의 면면에 쏠렸다. 위원장은 이규성 전 재경부 장관(현 KAIST 교수)이 맡았다. 장명국 내일신문 운영위원장, 배찬병 생명보험협회장, 노성태 한국경제신문 상무이사, 최운열 서강대 교수, 이문성 한미법무법인 변호사, 전성빈 서강대 교수 등 7명이 위원으로 위촉됐다. 이 전 장관과 배 회장은 이근영 금감위원장과 같은 대전고 출신. 여기에 서강대 교수가 두명인 점도 눈길을 끌었다. 금융계에서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대전고 출신과 지난해 가을부터 급부상한 이른바 ‘서강학파’가 포진한 것이다. 여기에 한국개발연구원(KDI) 출신인 노 상무가 위촉된 점을 중시해 금융계에선 ‘대전고-서강학파-KDI’의 3각축이 형성됐다고 풀이하기도 했다. 금감위 등은 CEO를 뽑기 위해 후보리스트를 만들었다. 황영기 삼성투신운용 사장과 하영구 씨티은행 서울지점 소비자금융그룹대표도 영입대상이었다. 두 사람은 진념 재경부 장관이 밝힌 ‘국제금융경험을 가진 40대 젊은 피’였다. 그러나 정건용 금감위 부위원장이 높이 평가한 것으로 알려진 황 사장은 99년 12월 계열사에 대한 부당금융지원으로 금감위로부터 문책경고를 받은 게 흠이었다. 하 대표는 ‘연봉’이 걸림돌로 작용했다. 지주회사 CEO는 노련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지적도 이들을 영입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약화시켰다. 결국 이경재 기업은행장, 윤병철 하나은행 회장으로 압축됐다. 이헌재 전 재경부 장관이 CEO를 맡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으나 본인이 고사했다는 후문이다.
금융지주회사 CEO가 발표되기까지는…
이경재 기업은행장도 2월 중순부터 정부 최고위층에서 호감을 갖고 있다는 얘기가 들리기 시작했다. 한국은행출신으로 공무원 출신이 아니라는 점, 은행 경영을 잘했다는 점이 강점으로 거론됐다. 이 행장은 2월27일 재경부를 방문했다. 이어 28일 오후 4시30분쯤 금감위원장을 찾았다. 이 행장이 내정된 것 아니냐는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러나 정 금감위 부위원장은 28일 오후 6시 윤 회장을 내정자로 발표했다. 이 행장이 재경부와 금감위를 방문해 두 수장에게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베일에 가려있다. CEO가 되기를 강력히 원했을 것이라는 해석과 강력히 고사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모두 가능하다. 정부 관계자들은 “하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맡기지 않겠다”고 밝혀왔다. 본인이 고사해도 역시 맡기기 어려운 게 지주사 CEO자리이다. 또 이경재 행장이 대구·경북(TK)출신이고 윤 회장이 부산·경남(PK)출신인 점을 들어 막판 ‘PK배려론’과 맞물려 윤 회장으로 기울었다는 해석도 등장했다. 이런 해석은 금융지주사 CEO 선정을 또 하나의 막판 뒤집기로 보는 시각이다. 기업은행과 외환은행과의 합병 문제, 이 행장의 친동생이 이정재 재경부 차관인 점, ‘순수 민간 CEO 기용’을 주장한 진 장관의 의중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금융지주회사 CEO선정이 끝나자 자회사 임원 내정과정에 관심이 집중됐다. 경남은행장에는 홍순우 감사가, 평화은행장에는 허고광 외환은행감사가 물망에 올랐다. 강낙원 광주은행장은 바뀌지 않을 것으로 관측됐다. 윤 회장의 등장과 함께 모두 물갈이하는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3월5일 마침내 뚜껑이 열렸다. 옛 장기신용은행출신 두명이 행장이 됐다. 황석희씨가 평화은행, 강신철씨가 경남은행을 맡았다. 두 사람은 장기신용은행이 국민은행과 합병한 후 ‘실력’으로 살아남은 인물들이다. 또 장기신용은행에 근무한 적이 있는 윤 CEO와 호흡을 맞출 수 있는 인물로 꼽힌다. 김영덕 경남은행 감사도 하나은행 간부출신으로 윤 CEO와 인연을 맺고 있다. 한빛은행장이 된 이덕훈씨는 KDI-서강학파의 일원이다. 이 행장은 99년 ‘상업+한일은행’의 합병실무작업을 주도했다. 그는 상업·한일은행 합병추진위원회 부위원장 겸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서강학파와는 다른 색채의 박영철 전 금융연구원장이 합병추진위원장을 맡긴 했다. 어쨌든 합병은행 설계사로서 자본금을 다 까먹은 한빛은행 재건에 몸을 던지기로 한 것이다. ‘결자해지’에 나선 셈이다. 서강학파의 실세인 김병주 교수(국민-주택은행 합병추진위원장)와 윤 CEO, 이덕훈 행장은 모두 지난 97년 금융개혁 기치를 내건 금융발전심의위원을 지냈다. 한빛은행에는 이덕훈 행장과 호흡을 맞출 수 있는 인물들이 포진했다. 이 행장을 비롯해 사외이사인 김중웅 현대경제연구원장, 함준호 연세대 교수 등이 KDI와 연을 맺고 있다. 함 교수는 특히 최연소(38살) 사외이사로 주목받았다. 그는 금감위 정 부위원장의 조카다. 정 부위원장은 오해를 살 수 있어 말렸으나 이 행장이 적극 추천했다는 후문이다. 금융지주회사 산하 자회사의 감사자리는 또다른 ‘전쟁터’였다. 재경부와 금감위가 한 자리씩 차지했다. 박진규 홍콩재경관은 한빛은행 감사로, 양동혁 금감원 국장은 광주은행 감사가 됐다. 대전고 출신인 채가석씨(서울은행출신)는 평화은행 감사로 금융계에 복귀했다. 그는 서울은행이 주채권은행인 워크아웃기업 진도에서 감사로 일하고 있었다. 지역안배에 신경쓴 흔적도 엿보인다. 지방은행장에는 현지출신을, 시중은행인 한빛은행과 평화은행에는 중부권출신을 기용했다. 올해 은행권 인사의 특징은 로비가 난무했다는 점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IMF사태 전에는 은행 안에서 대충 누가 CEO감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돼 그 인물이 되도록 로비가 벌어졌는데 지금은 그런 위계질서가 무너졌다”고 지적했다. 준국영화 조처로 은행 주인이 정부인 경우가 많아 밖으로 뛰어야 임원배지를 달 수 있다는 것이다.
로비로 관치 색채 뚜렷… 5월이 걱정되네
이런 로비가 난무하면서 나눠먹기, 자파세력심기 차원의 인사가 이뤄지고 있다는 비판이 많다. 특히 관치 색채가 더 강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대표적인 게 감사자리다. 국내 22개 은행의 감사 중 공직출신자(내정자 포함)는 16명으로 72.7%에 이른다. 공직자출신 감사비율은 지난 99년 12명(50%)에서 지난해엔 15명으로 늘었고 올 들어서 또 불어났다. 산업, 수출입, 기업 등 3대 국책은행의 일부 임원임기가 5∼6월에 끝나고 3월 결산법인인 증권사와 투신사 등 은행계 자회사들이 5월에 주총을 열 예정이어서 금융계 인사를 둘러싼 혼탁한 싸움은 계속될 전망이다.
허귀식/ 이데일리기자 hks@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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