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소액주주 왕따? 누구 맘대로!

경제5단체 총공세 속에 치러진 주주총회… 발언권 제한 등 구태 여전했지만 성과도 있어

올해 정기주주총회의 최대 격전지인 삼성전자 주총(3월9일 서울 호암아트홀).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었지만 초반부터 파열음이 요란했다. 회의장에 마련된 600여 자리는 시작 종이 울리기도 전에 이미 빽빽이 들어찼으며 통로까지 순식간에 메워져 뜨거운 열기를 반영했다. 내외신 기자들도 200명 가까이 몰려 이 자리가 ‘세계적 뉴스’의 현장임을 실감하게 했다.

참여연대와 삼성전자 사이의 한판 격돌은 일찌감치 예정됐던 바였다. 참여연대가 이 회사 주총에 참여한 뒤로 해마다 주요 주총안건을 둘러싸고 격돌없이 지나간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올해는 양상이 완전히 달랐다. 지난해 주총 때까지는 참여연대쪽에서 먼저 문제제기를 하고 이에 대해 삼성쪽이 해명을 하거나 반박하는 양상을 띠었으나, 올해 주총에서는 장외에서 그것도 주객이 뒤바뀐 듯한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주총이 열리기 이전부터 삼성에서 먼저 선제공격에 나서 ‘참여연대 흠집내기’에 열을 올렸다.

세계적 뉴스 진원지로 떠오른 삼성전자 주총

주총을 열흘여 앞둔 지난 2월27일 오전,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회(위원장 장하성·고려대 교수)는 서울 안국동 참여연대 회의실에서 삼성그룹 및 삼성전자 출입기자들과 간담회를 열었다. 올해 주총의 목표와 요구사항을 기자들에게 전달하는 자리였다. 간담회에서 참여연대는 ‘독립된 사외이사 선임’을 올해 목표로 삼고, 삼성전자의 경우 전성철 세종대 세계경영대학원장을 소액주주 후보로 추천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일부 기자들 손으로 ‘괴문서’가 나돌았다. 삼성쪽에서 출입기자들이 참여연대와 간담회에 갖는다는 사실을 알고 ‘참여연대에 질의할 사항’을 친절하게 만들어 몇몇 기자들에게 은근슬쩍 나눠준 6쪽짜리 인쇄물이다. 괴이한 것은 여기에 담긴 내용. 그간 참여연대 활동과 주장의 문제점을 삼성쪽 시각에서 정리한 것까지는 그래도 기자들이 봐줄 만했다. 그러나 사실적인 근거나 논리적 타당성도 없이 참여연대와 장하성 교수의 활동의 문제점, 심지어 도덕성까지 문제삼는 내용들이 들어 있었다. 일부 대목을 그대로 소개하면 이렇다.

‘참여연대는 몇몇 기업들에 대해 매년 사외이사를 추천하고 있는데, 공익을 추구하는 시민단체가 특정인을 특정이사 후보로 추천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은가’, ‘참여연대 부집행위원장인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는 99년에 발표한 자료에서 소액주주운동은 재벌개혁운동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소액주주들을 재벌개혁이라는 정치운동에 이용하는 측면이 있는 것은 아닌지?’, ‘참여연대는 매년 기업주총 때 여론을 지나치게 의식해 깜짝쇼를 자주 연출하는데, 이는 PR효과로서는 매우 좋으나 순수한 시민운동가가 활용하기에는 적당한 수단이 아니라고 본다.(중략) 이번에도 삼성전자 주총 때 깜짝쇼를 준비하고 있는가’.

장하성 교수에 대한 인신공격성 질문은 낮이 뜨거울 정도이다. ‘J 교수(장하성 교수를 말함)는 소액주주운동을 통해 공도 많지만 얼마 전부터는 자아도취에 빠져 마치 모든 소액주주를 대변하는 듯한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특히 언론 인터뷰시 자기가 말한 내용에 관해서는 한자도 빠져서는 안 된다는 고압적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이는 공인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바른 자세가 아니지 않은가’, ‘작년 김대중 대통령 독대 이후 부쩍 활동을 강화하고 있는데 어떤 정치적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일각에서는 재벌을 압박하기 위한 정권의 선봉장 노릇을 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 소개된 대목 외에 가족관계를 들먹여 ‘공익을 추구하는 시민운동 단체의 장으로 도덕성의 문제와 결격사유가 되는 것은 아닌가’라는 내용도 들어 있다. 스스로 국내 최고라고 자부하는 삼성이, 그것도 기자들에게 ‘참여연대에 가서 한번 물어보라’고 뿌렸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인신공격성 질문 등으로 참여연대 흠집내기

주목할 점은 이 인쇄물의 근저에 깔려 있는 논리는 이후 전개된 재계의 참여연대 공격논리와 거의 똑같다. 이는 삼성쪽에서 참여연대를 몰아세우기 위해 미리 사전에 치밀한 준비작업을 했고, 재계와도 나름대로 입을 맞추었지 않았느냐는 추측을 낳게 한다. 아니나 다를까, 재벌옹호 논리의 산실 구실을 하고 있는 자유기업원의 민병균 원장이 3월2일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참여연대가 벌이고 있는 소액주주운동을 더이상 지속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고, 전경련을 비롯한 경제5단체 부회장들은 삼성전자 주총 바로 이틀 전(3월7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긴급 조찬모임을 연 뒤 ‘소액주주운동에 대한 경제계 입장’이란 공동선언문을 발표하기까지 했다. 이 선언문에서 경제5단체 대표는 “일부 시민단체의 소액주주운동이 경제민주화라는 명분 아래 자신들이 추천한 사외이사를 기업경영에 관여시켜 경제논리보다는 정치논리로 경영을 이끌어가려 하고 있다”며 “이로 인한 기업의 효율성 저하는 결국 기업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주주이익을 훼손할 뿐”이라고 밝혔다. 경제5단체의 이날 성명서는 참여연대의 소액주주운동에 대한 재계의 총공세선언이나 다름없다.

참여연대쪽은 즉각 반격을 가했다. 장하성 위원장은 이날 증권거래소 기자실에서 회견을 열고 “삼성전자 주총을 이틀 앞둔 시점에서 자유기업원에 이어 경제5단체까지 나서 소액주주운동 중지를 요구하는 진의가 의심스럽다”며 “참여연대와 소액주주운동을 압박하려는 재계쪽 의도가 노골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 위원장은 특히 “현대중공업, SK텔레콤 등이 참여연대 추천 사외이사를 임명하는 등 소액주주운동을 수용하고 있는데, 유독 삼성그룹만 적대감을 표시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참여연대가 주총에서 소액주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독자적인 사외이사 후보를 낸 것은 사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외환위기 이후부터 연례행사가 되다시피했다. 그런데 유독 올해 주총에서는 재계 전체가 나서 참여연대를 집중공격하는 양상이 벌어진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재용씨 문제에는 감정적 대응 일삼아

이에 대한 해답은 싸움의 당사자인 삼성그룹의 내부사정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이건희 회장의 외아들 재용씨를 삼성전자 경영진으로 무리없이 들어앉혀야 할 사정이 바로 그것이다. 이에 최대 걸림돌인 참여연대를 사전에 제압함으로써 ‘재벌의 경영 세습논란’을 조금이나마 희석시키려는 의도를 여러 가지 정황으로 충분히 읽을 수 있다. 또 재벌 2·3세의 순탄한 경영세습은 비단 삼성그룹에 국한된 게 아니라 재벌 전체가 ‘반드시 사수해야 할 관행’이라는 점에서 삼성전자 주총은 재계 전체의 이해와도 맞물려 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싸움의 접점이 넓어졌다는 해석이 유력하다.

삼성전자 주총장에서 의장을 맡은 윤종용 부회장은 비교적 여유있게 회의를 진행하다가도 이재용씨 문제만 불거지면 아주 과민한 반응을 보인 모습이 여러 번 눈에 띄었다. 참여연대 김기식 정책실장이 “지금이 봉건왕조시대도 아니고 경영능력을 타고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3세에게 경영권을 물려줄 수 있느냐”고 꼬집자 윤 부회장은 “김기식이 와서 삼성 인사 다 해라. 정회하고 나하고 한판 붙자”는 등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내보였다. 이재용씨 문제가 얼마나 민감한 사안인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숱한 논란과 소액주주를 대표한 시민단체쪽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삼성전자는 주총 다음날 바로 이사회를 열어 이재용씨를 상무보에 선임했다. 전날 주총에서 새로 선임된 이사들이 모두 이 문제에 전혀 반기를 들지 않을 인물들로 구성된 결과이다.

추천 사외이사 후보 16% 지지의 의미

참여연대로서는 이번 삼성전자 주총을 계기로 현재 국회에 계류돼 있는 집중투표 의무화제도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한 듯하다. 집중투표제란 말 그대로, 이사를 선임할 때 주주가 특정후보에게 표를 몰아서 행사할 수 있게 하는 제도이다. 가령 10명의 이사를 뽑는데 1% 지분을 가진 주주가 있다면 이 주주가 9명의 후보에 대한 투표권을 포기하는 대신 다른 1명의 후보에게는 10%(지분율×이사후보 수)만큼의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현재 집중투표제는 지분율 1% 이상 주주의 요청이 있으면 도입할 수 있게 돼 있지만, 재계쪽의 집중 로비로 정관으로서 배제할 수 있게 해 있으나마나한 실정이다. 이 때문에 소액주주를 대표하는 사외이사를 선임할 수 있는 길은 원천봉쇄돼 있다. 참여연대는 삼성전자의 주총 표대결에서 지긴 했지만 사내이사(비상임) 후보로 추천한 전성철 교수에 대한 찬성표를 무려 16% 이상 이끌어냈다. 집중투표제가 실시됐다면 충분히 이사로 진입시킬 수 있는 규모다.

사외이사는 일상적 경영활동에 참가하지는 않지만 소액주주를 대신해 대주주나 경영진의 전횡을 감시, 견제하는 구실을 하는 이사이다. 그러나 삼성전자를 비롯한 대부분 대기업들은 ‘대주주나 경영진으로부터 독립된 사외이사’의 선임을 원천봉쇄해 사실상 이 제도의 취지를 살리지 못한 채 구색만 갖춰놓고 있다. 올해 주총에서 사외이사 수 충족 요건을 맞추는 방식을 봐도 이런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정부가 올해 4월1일부터 자산규모 2조원 이상 상장기업들은 전체 이사 중 과반수를 사외이사로 채우도록 규정을 바꾸자, 분모(전체 이사 수)를 줄이는 방법으로 이를 맞췄다. 삼성전자가 등기이사 수를 21명에서 14명으로, LG전자는 12명에서 8명으로 줄였다. 나머지 재벌계열사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이다. 전체 이사 수를 줄이는 것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지만, 소액주주들의 요청을 피해나가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됐다는 점이 씁쓸함을 더했다.

올해 주총에서도 투자신탁회사를 비롯한 기관들이 투자자 이익보다는 회사쪽 의견을 그대로 좇는 거수기 노릇에 머무는 행태는 여전했다. 투신을 비롯한 기관들은 주총에 참여해 제 목소리를 내기보다 아직 회사쪽에 의결권을 위임함으로써 고객재산에 대한 선량한 관리자로서 져야 할 의무를 저버렸다. 이는 재벌 계열사들의 막대한 예탁금에 ‘코’가 꿰어 주총 때마다 압력을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빈축을 사고 있다. 회사쪽에 우호적인 직원들을 동원, 주총장을 선점해 회사쪽에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소액주주들의 발언권을 극도로 제한하는 구태가 재연되는 일도 흔했다.

물론 희망의 싹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소액주주운동의 위력이 날이 갈수록 더해가고 있어 차근차근 제도개선이 이뤄질 토대를 제공하고 있다. 장하성 교수는 “소액주주 제안으로 추천한 후보가 삼성그룹의 실세라는 이학수 후보와 맞대결해 16.07%의 지지를 얻은 것은 애초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오너가 없는 대기업인 담배인삼공사가 대형 상장사로는 처음으로 정관의 집중투표제 배제조항을 삭제키로 한 것도 올해 주총에서 눈여겨볼 대목이다. 담배인삼공사의 소액주주 지분은 11.8%이며 이 가운데 1% 이상만 모이면 집중투표 요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

소액주주 대접하면 기업에도 이롭다

참여연대는 올해 주총에서 3개 대기업만 타깃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들 3개 대기업말고 다른 기업의 주총장에서도 소액주주들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컸다. 이제는 소액주주들의 자발적인 운동으로 확산되는 추세인 셈이다. 이 과정에서 회사와 소액주주 사이에 협력관계가 형성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대우전자를 비롯 대우 계열 상장사들의 소액주주운동이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대우전자의 경우 지난해 3월 주총 때는 소액주주들의 주총장 입장을 아예 원천봉쇄한 가운데 일방적으로 안건을 처리하려다 소송에 휘말렸는데, 소액주주들의 참여가 꾸준히 늘어나고 회사쪽 태도가 바뀜에 따라 올해 들어선 회사 정상화를 위해 서로 돕는 관계로 발전하고 있다. 회사쪽은 지난해 12월 소액주주들을 초청, 회사경영 전반에 대한 설명회를 연 데 이어 올해 주총을 앞두고는 소액주주들과 주총안건을 협의해 사전조율하고 이들이 추천한 사외이사 1명을 선임하기로 합의했다. 소액주주쪽에선 자신들의 사이트(antjuju.com)에 대우전자 제품 광고를 무료로 실어주고 일부 주주들은 대우전자 제품 사주기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회사쪽으로선 경영정상화의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셈이다.

장하성 교수는 “소액주주운동은 이기고 지는 싸움이 아니며 짧은 기간에 결론이 나는 운동도 아니다”며 “이 운동을 통해 국가경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재벌기업들의 투명경영, 책임경영에 문제가 있으면 이를 지적하고 개선하도록 이슈화하는 것 자체가 큰 성과”라고 말했다.

박순빈 기자 sbpark@hani.co.kr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