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은닉재산 추적, 속도 붙는가

예금보험공사 조사권 확보로 부실기업·기업주가 빼돌린 공적자금 회수 기대감

서울 중구 다동 예금보험공사 빌딩 14층에는 무게 650kg의 육중한 철제 금고가 사무실 벽쪽에 자리잡고 있다. 이 금고는 예보 전담직원 1명에 의해 철저히 관리되고 있다. 전담직원을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여기에 접근할 수 없다. 예보 사장도 예외가 아니다. 잠금장치는 이중이다.

마치 거대한 괴물 같은 느낌을 주는 이 금고에는 대체 무슨 귀중품이 들어 있는 것일까. 이중잠금 장치를 통과해 이 금고 문을 열어젖히면 한 묶음의 서류뭉치와 15개 안팎의 디스켓이 금고 상단에 놓여 있는 걸 보게 된다. 나머지 공간은 텅 비어 썰렁한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오는 4월부터 기업 조사권 본격 행사

고작 이 정도 물건이냐 싶겠지만, 예보에서는 가장 귀중한 것들이다. 여기에 들어 있는 서류묶음과 디스켓은 금융기관 부실화에 책임있는 이들의 개인 정보를 총망라하고 있다. 부실 금융기관 대주주 및 채무자 은닉재산 정보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른바 ‘공적자금 하마’들이 빼돌린 재산을 추적하기 위한 기초 자료뿐 아니라 이미 추적작업을 벌여 찾아낸 정보도 들어 있다. 앞으로 이 금고에 넣을 정보는 지금보다 더욱 풍성해질 것으로 보인다. 예보가 기업 조사권을 확보해 4월부터는 본격 행사에 나설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는 금융기관 부실화에 책임있는 기업 및 기업주들의 은닉재산 사냥에 탄력이 붙을 것이란 기대를 낳고 있다.

예보의 조사권이 지금까지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예금자보호법상 완전퇴출돼 파산(또는 청산) 재단으로 넘어간 금융기관의 임직원에 한해 조사를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아직 살아 있는(영업중인) 금융기관의 임직원에 대해선 예보의 자금지원이 이뤄졌더라도 조사권이 미치지 못했다. 이 때문에 부실의 책임을 묻는 데 한계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부실을 일으킨 기업의 대주주 및 임직원에 대한 조사는 원천적으로 차단돼 있었다. 이 때문에 금융기관을 부실에 빠뜨린 기업과 기업인에 대해 법적 권한이 없는 상태에서 은밀하게 조사를 진행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또 예보가 직접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할 수도 없어 금융기관의 파산재단 관재인이 손해배상청구를 내주기를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는 딱한 지경이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 등 부실 기업주들의 예를 들어보자. 누가 보더라도 이들은 은행을 비롯한 국내 금융기관들의 부실화에 커다란 책임이 있다. 금융기관의 부실이라는 게 대부분 기업에 꿔줬다 해당 기업의 부실화로 돌려받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실에 책임이 있는 장본인들은 책임을 지기는커녕 교묘하게 재산을 빼돌리는 사례까지 드러나 국민들을 허탈케 했다. 그러나 예보는 법적 권한이 없어 이들 부실 기업주에 대한 조사를 제대로 진행할 수 없었다. 관련 정부 부처로부터 개인정보를 어렵사리 협조받아 비밀리에 재산 추적작업을 벌이는 정도였다. 이 때문에 제대로 된 재산 추적이 이뤄지지 않았으며 정작 부실을 일으킨 주범들은 떵떵거리며 산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던 것이 이제 사정이 바뀌었다. 지난 3월5일 정부가 국무회의 의결을 통해 예보에 기업조사권을 주는 내용을 포함한 예금자보호법 시행령 개정안을 의결한 것이다. 이에 따라 예보는 금융기관 부실에 책임이 있는 기업의 업무 및 재산상황에 관한 장부, 서류, 기타 자료를 조사할 수 있게 된다.

예보는 기업 조사권 확보에 이어 3월20일부터 부실 기업 대주주 및 임직원에 대한 본격 조사에 나설 방침 아래 조직을 새로 짜고 전문 조사요원을 확보하는 등 준비 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다. 예보는 기업 조사를 위해 검찰 직원 4명, 경찰관 2명, 국세청 직원 2명, 예보 직원 14명 등 22명으로 특별조사반을 편성하고, 50여명으로 이뤄진 조사3부를 새로 만들어 부실기업 조사를 기획·총괄토록 할 방침이다.

조사 기반 취약해 성과 미약할 수도

예보 관계자는 “기업 조사권을 확보함에 따라 부실 기업주들의 은닉재산 추적이 한결 원활해져 공적자금 회수에도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란 기대감을 나타냈다. 이런 기대감 한편에는 걱정도 쌓이고 있다. 예보가 그동안 줄기차게 요청해온 조사권을 확보한 데 따라 이에 상응하는 성과를 내야 하는 부담을 함께 안게 됐는데, 현실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점에서다. 무려 21조원에 이르는 공적자금을 삼킨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은 당연히 조사대상에 오를 것으로 보이지만, 해외 도피중이어서 사실상 조사권의 범위에서 벗어나 있다는 게 단적인 예다.

이처럼 물리적으로 어려운 사례를 제쳐두고라도 조사 ‘인프라’(기반)가 구축돼 있지 않아 기업조사는 여전히 난항을 겪을 것이란 예측도 많다. 몇 차례 지적된 것처럼 국세청, 건설교통부, 행정자치부 등 관련 부처의 협조가 원활치 않아 조사 초기단계부터 어려움을 겪을 개연성은 여전한 실정이다. 예금자보호법 규정에 따르면 이들 부처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예보의 정보제공 요청에 응하도록 돼 있지만, 특별한 사유에 대한 해석이 제각각이어서 거부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런 상황 아래에선 기업 조사권의 효과는 대단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다행히 부처간 협조가 원활해져 예보가 부실 기업주의 은닉재산을 찾아낸 뒤에도 문제는 남는다. 예보는 은닉재산 추적 뒤 파산재단(망한 금융기관의 해체작업을 벌이는 법인)의 관재인에게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토록 하는 절차를 통해 공적자금을 회수하게 된다. 따라서 예보와 파산 관재인은 호흡이 잘 맞아야 일의 진척이 빠르다. 이런 배경을 근거로 국회는 지난해 12월 공적자금관리특별법을 만들어 공적자금을 지원받은 금융기관이 파산할 경우 예보나 예보 임직원을 파산관재인으로 뽑도록 했다.

그런데 엉뚱한데서 일이 꼬였다. 법원쪽이 공적자금특별법에 제동을 건 것이다. 서울지방법원 파산2부(재판장 이형하 부장판사)는 지난 1월 “공적자금관리특별법은 파산관재인 적격 여부를 심사할 법원의 고유권한을 박탈하는 것으로 사법권 침해 소지가 있다”며 위헌심판을 청구했다.

파산법인은 일반회사와 다른 묘한 성격이 있다. 회사해체 과정을 밟고 있기 때문에 임직원들이 열심히 일하면 할수록 오히려 일찍 일자리를 잃는 결과가 되기 십상이다. 이는 부실 금융기관에 투입된 공적자금 회수를 더디게 하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때문에 파산법인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 관재인이 필요하고 이 역할을 예보가 맡아야 한다는 게 예보쪽 주장이다. 통상적인 파산법인처럼 중립적인 변호사가 관재인을 담당할 경우 회수작업이 아무래도 더딜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지금까지 이뤄진 성과 비교에서 어느 정도 증명된다.

지난 1월 말 현재 총 230개 금융기관이 파산절차에 들어가 있는데 이곳에서 근무중인 관재인 164명 가운데 변호사는 127명(77.4%), 예보 직원은 30명(18.3%)이다. 예보 조사결과 예보 직원을 관재인으로 두고 있는 파산법인에선 1차 청산배당까지 걸린 시일이 파산선고 뒤 평균 220일이었던 반면, 변호사 관재인 재단의 경우 420일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그만큼 회수가 더디다는 것이다. 아직 배당을 실시하지 못한 재단을 놓고 비교했을 경우에도 160∼420일(파산선고 뒤 경과 기일)이란 효율성 격차가 나타났다.

“재산 빼돌린 사람에 너무 관대하다”

예보 관계자는 “일반법인의 파산관재인은 다양한 채권자의 이해를 조정해야 한다는 점에서 변호사가 맡는 게 불가피할지 모르지만, 금융기관 파산법인의 경우 업무가 복잡할 뿐 아니라 채권의 70∼80%가 예보 몫(결국 국민 세금)이기 때문에 예보가 맡아야 공적자금 회수가 신속히 이뤄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금융연구원 이재연 박사도 “금융기관 파산관재인을 연방예보(FDIC)가 맡고 있는 미국의 예를 굳이 들지 않더라도 공적자금 회수의 효율성, 신속성 측면에서 예보나 예보 직원이 파산관재인을 맡는 게 바람직할 것”이라고 말했다.

파산관재인 선임과 함께 ‘강제집행면탈죄’ 문제도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부실을 초래하고 재산을 빼돌린 이들에 대해선 민사소송(사해행위 취소)뿐 아니라 형사소송(강제집행면탈죄)으로도 걸어 일벌백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예보는 강제집행면탈죄로 고발하려면 요건이 너무 까다롭다는 판단에 따라 형사고발 조처는 한번도 한 적이 없다. 이에 대해 참여연대 등에선 혐의가 뚜렷할 경우 민사소송에 그치지 말고 검찰에 형사고발하는 적극적인 태도를 요청하고 있다.

파산 경과 기간별 파산 재단 현황

2001년 1월 말 기준/단위:개

구분

2년이상

~18개월

~1년

~6개월

6개월미만

은행

5

-

-

-

-

5

종금

13

3

1

-

1

18

금고

-

17

7

9

10

43

신협

38

24

54

22

15

153

증권

2

1

2

-

1

6

보험

4

-

-

1

-

5

62

45

64

32

27

230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