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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김정일의 거침없는 '통일공세' 언론사 사장단 면담내용 곰곰이 뜯어보면 ‘일관된 논리’… 국가보안법도 왜소하게 만들어
김 국방위원장의 발언들은 한편으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게도 만들고 또 한편으로는 수긍이 되기도 한다. 남북간 언어 차이나 평소 말하는 스타일 때문에 제대로 의미 전달이 되지 않는 부분도 눈에 띈다. 김 국방위원장에 대해 별로 좋지 않은 인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종잡을 수 없는 횡설수설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터이지만 그것은 또 한번의 ‘오해’일 가능성이 높다. 지난 6월 정상회담과 이번 언론사 사장단 면담 내용을 곰곰이 뜯어보면 김 국방위원장은 ‘종잡을 수 없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서는 일관된 논리를 펴고 있다.
판문점 기피의 진짜 이유는 미국
하나는, 북쪽이 말하는 연방제든 남쪽이 말하는 연합제든, 이미 통일된 국가의 북쪽 지역을 담당하는 지도자로서 사고하고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북한을 강성대국으로 만들겠다는 굳은 의지를 갖고 움직인다는 것. 아직도 북쪽을 세끼 밥도 해결하지 못하는 가난하기 짝이 없는 ‘국가도 아닌 반국가단체’라면서 국가보안법의 한두개 조항의 개폐를 놓고 티격태격하는 남쪽과는 남북관계에 접근하는 차원이 달라 보인다. 김 국방위원장은 6·15 공동선언의 ‘선물’로 현대아산쪽에 “개성을 줬더니 정몽헌이 입이 찢어져 갔습니다”라고 예의 거침없는 말투로, 현대쪽에 ‘특혜’를 준 사연을 소개했다. 남북관계를 제일 먼저 뚫고 소도 1500마리나 가져온 현대쪽에 개성시에 공업ㆍ관광단지를 조성하도록 특혜를 베풀었다는 것이다. 북쪽에서 김 국방위원장의 말이 갖는 무게를 놓고 볼 때 남한 주민들이 승용차를 타고 개성시에 가서 고색창연한 고려시대 문화유적을 관광한다는 것이 더이상 꿈만은 아니게 됐다. 개성은 자유로만 타면 서울에서 단 몇십분 거리여서 마치 가까운 유원지에나 다녀오듯 가벼운 차림으로 다녀올 날을 기대해도 좋게 됐다. 대규모 공업단지와 병원, 아파트 등 각종 배후시설로 새롭게 단장하게 되면 지척이면서도 만리 같았던 개성시는 분당, 용인 같은 수도권의 여느 도시쯤으로 여겨지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열강이란 달리 표현하면 ‘외세’를 말하고 북쪽에 가장 문제되는 외세는 말할 것도 없이 미국이다. 판문점을 피하는 이유는 쉽게 말해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고 있는 데 대해 불쾌감을 표시한 것이다. 남한 주민들이 개성시를 오가고 이산가족들이 판문점 아닌 금강산에서 만나며 항공로를 통해 남북을 왕래하는 경우 남북 주민 모두에게 군사분계선이란 ‘관념’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남북 양쪽이 한 민족으로서 일체감을 느끼게 될 때 자연히 외세, 즉 미군의 존재는 비정상적인 것으로 부각되게 된다. 북쪽이 통일 뒤에도 주한미군을 용인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말들이 전해지고 있지만 이것도 엄밀히 보면 언젠가는 물러날 수밖에 없는 미군을 염두에 둔 포석인 것처럼 보인다. 김 국방위원장이 “주한미군 철수 문제는 미국이 알아서 할 문제”라고 한 것은 달리 말하면 미군 철수 문제는 미국이 알아서 용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조성될 것이라는 뜻에서 한 발언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남북이 자유롭게 왕래하는 마당에 전쟁 위협이 상존한다는 주장은 발붙일 자리가 없다. 전쟁 발발 가능성이 현저하게 사라진 마당에 주한미군의 존재 의의란 무엇인가에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국가보안법에 대한 김 국방위원장의 언급이다. 그는 국가보안법을 남쪽이 개정하든 하지 않든 북쪽이 노동당 규약을 개정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실제 이행조처가 언제 이뤄질지 아직은 확실치 않지만 김 국방위원장은 이 말 한마디로 국가보안법 개정 여부를 둘러싸고 지루한 승강이를 벌이고 있는 남쪽 지도층을 단번에 왜소하게 만들어버리는 효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국가보안법은 주지하다시피 북쪽을 반국가단체로 인식하도록 ‘강요’하고 있는 법이다. 반국가단체니 이적단체니 하는 용어들은 지난 반세기 동안 남한 주민의 대북인식을 규정해온 일상화된 용어였다.
지엽말단적 소모전은 그만
그러나 정상회담 이후 눈이 핑핑 돌 정도로 진전되고 있는 남북관계는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귀에 익숙했던 용어들을 정반대로 생소하고 낯선 말들로 바꿔놓고 있다.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쪽본부 등을 아직도 친북이적단체로 규정하는 당국의 유권해석은 법적으로는 타당할지 몰라도 현실과는 동떨어진 우스꽝스런 모습이다. “법은 현실을 반영한다”는 법학계의 통설을 북쪽이 먼저 간파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번 면담 내용 가운데에는 북한의 미사일 개발 포기설에 대한 명확한 설명도 들어 있다. 김 국방위원장은 ‘미사일 개발 포기설’에 대해 “그냥 웃는 얘기로 푸틴 대통령한테 한 것”이라고 말해 ‘웃는 얘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푸틴 러시아 대통령쪽이 ‘확대해석’ 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로켓 한발에 2억∼3억달러가 들어가는데 미국이 우리 위성을 대신 쏴주면 우리가 개발을 안 하겠다고 푸틴 대통령에게 얘기했다”고 말해 ‘조건부 미사일 개발 포기설’을 발설한 사실은 인정했다. 그러나 “과학기술과 첨단기술을 위해서 이런 얘기를 서로 웃으면서 그냥 웃는 얘기로 푸틴 대통령한테 한 것인데 푸틴 대통령이 아무 소리도 안 하더니 내 얘기를 꽉 잡아쥐고 그랬습니다”고 해명했다. 그냥 해본 얘기를 푸틴 대통령이 “위성발사를 대신해 주는 조건으로 미사일 개발을 안 하겠다”는 것으로 외부에 전파했다는 설명이다. 최초 발설 당사자인 김 국방위원장가 ‘웃는 얘기로 해본 것’이라고 해명함으로써 지난달 19, 20일 북ㆍ러정상회담 이후 약 한달 동안이나 설왕설래했던 북한의 조건부 미사일개발 포기설은 ‘우스운 얘기’로 끝나고 만 셈이 됐다. 북한의 강성대국 건설론에 따르면 사상ㆍ군사ㆍ경제 세 분야에서 강국이 돼야 강성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 인공위성 몇개를 대신 쏴준다는 조건으로 전략 미사일과 인공위성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추진체(로켓) 개발을 포기한다는 것은 애당초 북쪽 강성대국 건설 논리와는 부합되지 않는 것이었다. 있는 그대로 북한을 봐야 한다는 주장은 여전히 유효하다. 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는 전쟁위험이 배제된 상황에서 자기 체제 중심의 통일을 목표로 본격적인 선의의 체제경쟁에 돌입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급변하는 한반도 정세를 외면한 채 지엽말단적인 문제에 매달려 소모전을 벌인다면 남쪽으로서는 생각하기도 싫은 결과가 초래될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정일용/ 연합뉴스 민족뉴스취재본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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