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점 ] 2000년08월09일 제321호 

[초점] 현대 기싸움, 꼼수가 있나

심각한 자금난에도 정부 채권단 쥐락펴락... 위기 상황에도 금감위원장에 취중 전화


(사진/현대의 웃음?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이 지난 7일 김포공항 입국장을 나서고 있다)


현대건설 자금난을 둘러싼 정부·채권단과 현대그룹 사이의 밀고당기기 과정에서 막후싸움이 치열하다.

현대가 특유의 뚝심을 발휘해 정부와 채권단 관계자들한테 오히려 협박을 가하는가 하면, 때로는 궁지에 몰아넣기도 한다. 정부는 현대사태와 관련해 전례없는 태도를 보여왔다. 예전에는 적어도 겉으로는 정부가 직접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고 채권단으로 하여금 해당 기업의 구조조정을 유도하는 모습을 띠었으나 이번 현대사태에선 대응방식이 달랐다. 정부가 현대쪽과 직접 접촉하는가 하면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을 통해 분명한 가이드라인(세 가지 원칙)을 제시하는 등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그동안 정부가 고수해온 기업구조조정의 기본원칙, 즉 채권단과 기업간 자율협약에 의한 구조조정(이른바 ‘런던 어프로치’)방식을 벗어난 것이다.

비공식 통로로 정치권에 자구책 제시

현대는 이 와중에서 부도를 낼 테면 내보라는 식의 위협도 불사하는 등 거세게 저항했다. 현대건설 자금난을 해결하려면 채권단의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현대가 국가경제에 끼치는 영향을 감안할 때 정부나 채권단이 함부로 처리하지 못할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현대의 저항은 개각(8월7일)을 앞두고 특히 강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이 과정에서 현대 옥죄기의 전면에 나섰던 이용근 전 금감위원장의 경우, 개각 직전에 몇 가지 ‘불쾌한 대접’을 받았다.

정부와 채권단간 접전이 본격적으로 불꽃을 튀기기 시작한 것은 지난 7월31일. 이전에도 정부의 조이기와 현대의 버티기는 계속돼 왔으나 현대의 자구책에 대한 금융당국의 원칙을 담은 가이드라인이 확실하게 제시된 건 이때였다. 금감위는 이날 외환은행을 통해 △현대자동차·현대중공업의 확실한 계열 분리 △오너 경영인·문제 경영인 퇴진(지배구조 개선) △현대건설의 강도높은 자구노력 등 세 가지 과제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행 가능한 방안을 제시할 것을 요청했다. ‘비공식적인’ 통로로 전달된 것이나 금감위·금감원은 이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정부의 3원칙이 제시되기 전 현대는 두번의 중대 고비를 넘긴 바 있다. 1차 고비는 1천억원을 웃도는 현대건설의 기업어음(CP) 만기가 돌아온 7월24일이었다. 현대는 이를 자체적으로 막는 뚝심을 발휘했다.

두 번째로 코너에 몰린 것은 이로부터 닷새 뒤인 29일. 현대건설은 이날 약 1500억원에 이르는 물품대금을 결제해야 할 상황이었다. 외환은행은 이를 현대쪽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는 호기로 판단, ‘자금지원을 해줄 테니 사재출연과 가신그룹에 대한 문책인사를 단행할 것’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현대건설은 그러나 계열사인 현대종합상사에 도움을 청해 500억원의 지원을 받아내 위기를 모면했다.

현대가 두 차례의 위기를 벗어나긴 했으나 사정이 크게 호전된 것은 아니었다. 현대건설의 경우 이달 들어 4일 200억원, 5일 300억원 등 거의 매일 수백억원에 이르는 운영자금 부족을 겪어야 했다. 현대는 이 와중에서 계열사나 협력업체를 쥐어짜는 방법으로 극복했다.

정부와 현대간 팽팽한 줄다리기에서 힘의 균형이 정부쪽으로 급격히 쏠리기 시작한 것은 3일 오후부터. 정부와 채권단의 요구 수준은 강도를 더해가는 반면, 현대쪽에선 채권단의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하겠다는 태도가 뚜렷하게 감지됐다. 공식 발표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정주영 전 명예회장의 현대자동차 지분 중 3%를 넘는 6.1%를 채권단에 위임하는 등 자구 방안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흘러나온 것이다.

금융당국과 채권단은 이날 현대그룹에 대해 주말(8월5일이나 6일)까지는 적어도 현대차 계열분리 방안은 제시돼야 한다고 다시 한번 고삐를 바짝 죄었다. 현대가 6일쯤 자구책을 발표하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도 바로 이때였다.

겉으론 꼬리내려도 속으론 희색이 돈다


(사진/현대사태의 근원적 해결은 불가능한가. “내 직을 걸고서 현대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강조해온 이용근 전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


현대쪽이 정부에 꼬리를 내리는 모습을 보인 뒷면에선 어처구니없어 보이기까지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8월 초 어느 날 현대그룹 핵심 인사가 한밤중에 만취한 상태에서 이용근 당시 금감위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현대건설을) 워크아웃할 테면 해보라”는 협박에 가까운 배짱을 부렸다는 것이다. 이는 이 위원장을 격분시켰으며 (현대건설의)워크아웃이나 법정관리도 불사한다는 강경한 발언이 터져나오는 계기가 됐다.

김재수 현대 구조조정위원장도 이 전금감위원장의 신경을 건드리는 발언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구조위원장은 4일께 전화통화에서 “정부쪽에서 요구하는 안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뜻을 밝혔으며 이 위원장은 이에 ‘열을 받아’집무실에서 전화통을 집어던지는 격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는 전언이다. 이 위원장은 정몽헌현대회장이 일본을 방문중이었을때 현대 계자들에게 전화연결을 요구하기도 했으나 거절을 당했다.

게다가 현대사태의 핵심 당사자인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은 청와대에 이용근 당시 위원장과 경제팀 핵심 관료 2명이 경제를 망치고 있다는 내용의 진정서를 냈으며 이 위원장이 이를 직접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쪽은 이 회장이 정책건의서를 낸 게 와전된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으나 금융계 안팎에선 이 회장과 이 위원장이 얼마나 날카롭게 대립해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근거로 해석하고 있다.

이 전 위원장의 심기가 크게 불편해진 데는 현대의 태도 자체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당시 ‘시점’이 경제팀을 중심으로 개각이 예고돼 있던 미묘한 때였다는 점도 적지 않이 작용했다. 현대가 이용근 위원장을 개각에서 교체될 대상으로 보고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었다. 현대의 진의야 어쨌든 이 위원장에겐 분명히 그렇게 받아들여졌으며 현대에 대한 공세 수위가 한층 높아지는 한 요인이 됐다.

현대는 정치권 등 외부세력을 동원해 정부에 압박을 가하려는 시도도 했다. 현대가 정부를 제쳐두고 정치권과 손을 대고 있음이 감지된 것은 이미 지난 5월 말부터이다. 5월31일 현대는 3부자 동반퇴진을 선언했데 이헌재 재경부 장관이나 이용근 금감위원장은 이같은 초강수 구조조정방안을 이날 오후 발표시점에야 뒤늦게 안 반면에 오전에 민주당 이해찬 정책위원장은 발표내용과 그 배경까지 기자들에게 설명했다. 현대가 정치권에 줄을 대고 있었음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이번에도 땜질식 처방만 내놓을 건가

이 밖에도 현대와 정치권에 호소한 흔적들은 한둘이 아니다. 금감원 고위관계자는 “정치권 인사들로부터 ‘이제 그쯤 해두지…’ 하는 식의 압력성 전화가 많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관계자는 “외압이 통할 사안은 아니지만 일하기가 어렵다”고 하소연했다.

주요 시중은행에서는, 유동성에 문제가 있는 일부 현대계열사의 자금담당 직원들이 ‘은행에 가보면 윗선의 메시지가 와 있을 것’이란 상층부의 말만 믿고 운영자금을 구하러 갔다가 ‘무슨 뜬끔없는 소리냐’는 답변을 듣고 머쓱하게 돌아선 일도 있었다.

현대는 개각을 앞둔 막판에 정주영 전 명예회장의 현대차 지분을 채권단에 담보로 맡기는 선에서 타협을 시도했으나 금융당국의 강경한 태도에 부닺혀 관철하지 못했다. 금감원 고위관계자는 “정주영씨의 자동차 지분을 확실하게 정리하고 문제경영진을 퇴진시키는 등 세 가지 원칙을 모두 충족시키지 못하는 방안이라면 아예 발표하지도 말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대는 핵심은 피해가고 모양만 갖추려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어쩌면 현대가 이번 개각을 보고 내심 쾌재를 부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김영배 기자kimyb@hani.co.kr

.




↑Back to the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