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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말장난이었다, 개혁! 기존 개혁정책에 저항해온 재벌진영만 환영일색… 현대사태 등 해결과정에서 원칙훼손 불가피
8·7개각이 발표되자 개혁적인 경제학자들부터 쏟아진 한결같은 반응이다. 시민·사회단체와 노동계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새로 짜여진 경제 각료들의 면면을 보면 개혁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청와대와 여당은 이번 개각의 의미에 대해 “안정 속의 개혁을 밀도있게 추진할 수 있는 인물들로 구성했다”고 강조하지만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많다. 국민의 정부 출범 초기부터 여러 가지 경제정책 입안에 자문활동을 해온 한 교수는 새 경제라인을 평가해달라고 주문하자, 또박또박 다섯 글자로만 대답했다. “어·이·가·없·다.”
진념에게 청사진은 있는가
공교롭게도 지금까지 정부의 개혁정책에 저항해온 재벌진영에서는 환영일색이어서 대조적이다. 전경련과 경총 등 경제단체에서부터 삼성과 LG 등 재벌그룹들까지 “개혁을 무리없이 현실에 맞게 추진할 수 있는 각료들”이라고 평가했다. 정부로부터 자구계획 제출압력에 시달리고 있는 현대는, 진념 신임 재경부 장관이 한때 기아자동차 경영을 맡은 경험을 부각시키며 은근히 ‘우군’을 얻었다는 태도를 보였다. “현장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 아니냐. 불편했던 정부와의 관계가 앞으로 원만하게 풀릴 것으로 기대한다.”(현대 구조조정위원회 관계자) 이에 화답을 하듯 진념 장관도 첫 기자회견에서 “기존 경제라인의 현대문제 해결방안이 원칙적으로 맞지만 시간과 강도 측면에서는 신축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며 “현대를 살리고 국가경제에 보탬이 되는 방향으로 문제를 풀어나가겠다”고 밝혔다. 지극히 당연한 얘기인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원칙의 훼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발언이다.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처리되면 곧바로 부총리에 올라 각 경제부처들을 총괄지휘하게 될 진념 재경부 장관. 5공화국 시절 경제기획원 차관보로 임명돼 정권이 4번 바뀔 동안 장·차관을 두루 거친 정통 경제관료이다. 관료들 사이에서 ‘직업이 장관’이란 얘기를 들을 정도로 억세게 관운이 좋은 사람이다. 서민적이고 주변 사람 누구한테나 좋은 매너를 보여 ‘조정과 통합능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또 스스로 ‘시스템주의자’라고 주장한다. 그때 그때 상황에 맞춰서 정책을 추진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추진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서 움직인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가 작동시킬 시스템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까? 이 대목이 뚜렷하지 않다는 게 진 장관의 약점이다. 시스템을 잘 짤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독자적으로 새로운 정책방향을 제시할 능력은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런 약점은 그가 국민의 정부 출범 뒤 2년 반 동안 기획예산위원장과 기획예산처 장관을 맡으며 추진해온 공공부문 개혁이나 재정수지 개선작업 등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공기업 민영화를 비롯한 공공부문 개혁은 초기에 계획과 일정만 그럴싸하게 내놓았지 지금까지 실제 성과는 지지부진하다. 특히 공기업 민영화의 경우 난관에 부닥치면 상황논리만 내세웠지 새로운 대안이나 청사진은 전혀 제시하지 못했다. 정책에 대한 철학과 소신이 뚜렷했다면 정면돌파를 시도했을 터인데, 진 장관은 삐걱거림 자체를 피해갔다. 그래서 큰 과오가 없는 대신에 자랑할 만한 족적도 없다. 재무부 차관, 경제기획원 차관, 해운항만청장, 동자부 장관, 노동부 장관 등 핵심 요직을 10여년 동안 두루 거쳤으면서도 ‘진념의 작품’이라고 평가할 만한 정책이 없다. 한마디로 새로운 일을 개발해서 한다기보다 주어진 과제를 무난하게 처리하는 스타일이다.
투신부실 책임자가 금감위장에
당면 개혁과제인 금융·기업구조조정에서도 정부의 칼날이 무뎌질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구조조정에서는 진념 장관이 전체적인 방향 조율, 이근영 신임 금감위원장은 야전사령관 구실로 역할분담을 해야 한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거시경제나 세제업무에 정통할 뿐 금융행정 경험이 약하다. 금융계에서는 벌써부터, 진념 재경장관-이근영 금감위원장 라인이 아주 민감한 시기에 금융시장을 잘 읽고 미세조정능력까지 발휘할 수 있을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더욱이 이근영 금감위원장은 지난 94년 3월 재무부 세제실장에서 낙하산 인사로 한국투신 사장으로 임명된 뒤 96년 8월까지 재직하면서 오늘날 투신부실에 책임이 있는 인물이다. 이 때문에 지난 5월 금융감독위원회로부터 주의적 경고를 받기도 했다. 징계를 받은 사람이 징계를 내린 기관의 수장이 돼 모양이 우스워졌다. 중장기적이고 전략적 안목이 더욱 필요한 산업정책에서도 정치논리가 지배할 것이라는 우려가 높다. 신임 신국환 산업자원부 장관이 자민련과의 공동정부 유지를 위한 정략적 나눠먹기식 인선이기 때문이다. 신 장관은 지난 92년 공업진흥청장으로 재임할 때 현대중공업이 조성한 비자금 500만원을 뇌물로 받은 사실이 검찰 수사과정에서 밝혀져 공직을 사퇴했다. 자민련의 낙선 지구당위원장에게 배려하는 몫으로 이번에 산자부 장관에 임명됐다. 신임 경제각료들에게서 개혁성을 찾기는 어렵지만 ‘팀워크’는 잘 맞을 것으로 보인다. 하기야 큰 일 저지르지 않고 안정위주로 정책을 운용하면 팀워크에 탈이 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기존 경제팀의 팀워크 문제는 인물들끼리 불협화음 때문이 아니라 종합적인 개혁청사진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으로 봐야 한다. 새 경제팀도 개혁을 포기하면 상관없겠지만, 지속적인 개혁을 추진하겠다면 팀워크를 맞추는 데만 안주해서는 곤란하다.
DJ 정부에서 개혁은 물건너갔다
함준호 교수(연세대 국제대학원)는 “구조조정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올 연말이나 내년 초쯤 경기가 본격적으로 하강국면에서 접어들 경우 잠재적인 문제들까지 한꺼번에 불거질 것”이라며 “현대사태와 같은 당면 현안들을 정공법으로 처리하지 않고 문제를 끌어안고 가려는 분위기로 흐르면 더욱 큰 위기를 맞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장하성 교수(고려대)는 이번 개각이 발표되기 하루 전날 전경련에서 기업지배구조개선안 반대성명을 발표한 데 주목하면서 “정부가 재벌개혁보다는 재벌들의 도움을 받아 남북경제협력에만 몰두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장 교수는 또 개혁이 물건너가는 듯한 느낌을 감추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경제위기 초기에는 IMF 구제금융이라는 외부충격에 의해 개혁프로그램이 자연스럽게 추동력을 가질 수 있었다. 이때는 주어진 프로그램을 잘 수행할 ‘행정기술자’들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 스스로 개혁프로그램을 만들어내어야 한다. 주어진 과제만 잘 수행하는 관료출신보다 정말 개혁마인드를 가진 새 인물을 등용했어야 했다. 내년쯤 다시 문제가 생겼을 때 개혁적인 인사를 다시 찾아봤자 아무도 동참하려 않을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DJ 정부에서 개혁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
박순빈 기자sb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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