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점 ] 2000년08월02일 제320호 

[초점] 대우를 닮아가는 슬픈 현대여!

상업차관을 외국자본 참여로 속임수 구조조정… 편법 일삼아 ‘숨겨진 위험’수두룩


(사진/현대의 잇단 눈속임은 시장의 외면을 불러올 뿐이다. 현대 위기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 위해 열린 긴급 은행장 회의)


“현대는 분명히 대우와 다르죠.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대우 짝날 것 같습니다.” 지난 7월26일 현대건설 한 직원이 월급을 하루늦게 받고 나서 내뱉은 말이다. 그는 5월부터 월급날만 다가오면 회사가 뒤숭숭하다고 전했다.

“국내에서 가장 큰 건설회사이자 최대 재벌그룹 지주회사의 직원들이 월급을 제때 받을 수 있을지 걱정하는 처지에 있다는 게 말이 됩니까? 열심히 일할 의욕도 나지 않습니다. 위기를 벗어나려면 문제를 꼬이게 한 총수 일가와 경영진들의 결단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가망이 없어 보입니다.”

3월, 5월, 7월. 올 들어 현대사태가 도지는 주기이다. 매번 금융시장이 요동을 치고 현대와 채권단, 정부는 사태수습에 곤욕을 치르고 있다. 채권단과 계열사들의 지원에 힙입어 현대건설은 월말 자금위기를 일단 가까스로 벗어나기는 했으나 앞으로 재발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위기의 뿌리가 아직 해소되지 않은 탓이다.

시장의 이유있는 외면… 현중의 막대한 손실

‘7월 현대사태’의 도화선은 두 가지이다. 7월24일 한국기업평가가 8개 현대 계열사의 회사채 신용등급을 하향조정한 것과, 바로 그 다음날 불거진 현대중공업의 계열사 외화차입금 대지급이다. 금융계에서는 현대 계열사들의 신용등급 하락은 그리 큰 사안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미 시장에서는 현대 계열 회사채가 ‘투자부적격’으로 취급되고 있었는데 신용평가회사가 뒤늦게 이를 반영했다는 게 금융계의 시각이다. 하지만 현대중공업의 지급보증 이행에서 비롯된 현대의 신뢰추락은 만만치 않다. 주주와 채권단에 그토록 강조해왔던 ‘착실한 구조조정’이 눈속임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현대전자는 97년 6월 현대투신증권 지분 1300만주를 캐나다 은행인 CIBC에 넘겨 1억7500만달러의 외자를 도입했으며, 이때 현대중공업은 CIBC로부터 3년 뒤 주식을 되사들인다(풋 바이백 옵션)는 이면계약을 맺었다. 이 거래에서 거간꾼 구실을 했던 인물이 현대증권 이익치 회장이다. 이 회장은 당시 현대중공업의 이면계약에 대해 ‘금전적 손실이 생기면 증권에서 책임을 지겠다’는 각서를 써줬다. 그러나 약속했던 ‘바이백’(Buy-Back) 시점이 다가왔는데도 전자와 증권쪽에서 ‘난 몰라’하는 바람에 현대중공업이 경과이자(연 7.9%)를 포함해 총 2억2048만달러(약 2400억원)를 CIBC에 주고 현대투신 주식을 떠안았다. 현대투신 주식은 상장이 되어 있지 않아 현금화하기도 어렵고 장외에서 판다고 하더라도 잘 받아야 5천∼1만원에 불과해, 옵션계약 이행에 따라 1100억∼1800억원의 손실을 안게 되었다는 게 현대중공업 설명이다.

하지만 현대중공업의 손실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현대전자가 계열사 지분을 매각해 외국자본을 끌어들인 것처럼 모양을 꾸미고, 실제로는 우량 계열사의 지급보증을 통해 상업차관을 도입했다는 점이다. 부실계열사를 살리려고 외국에서 꿔오는 빚을 자본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이는 현행 외자도입법상의 허위신고, 계열사간 부당내부거래와 상호지급보증을 제한하는 공정거래법 위반, 중요한 우발채무를 반드시 투자자들에게 공개하도록 한 증권거래법의 공시의무 위반 등 명백한 불법행위이다.

법적 대응은 현대중공업쪽에서 먼저 나섰다. 지난 7월28일 현대중공업은 현대전자와 증권, 두 회사의 대표인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과 박종섭 현대전자 사장을 상대로 외화대납금 반환 및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서울지법에 냈다. 손해배상을 받지 못하면 현대중공업 이사들이 난감해진다. 참여연대 이상훈 변호사는 “현대중공업이 전자와 증권 등으로부터 손실금액만큼 받아내지 못할 경우 현대중공업 경영진을 상대로 주주대표소송을 걸 방침”이라고 밝혔다. 소액주주들이 회사를 대신해 회사에 손실을 끼친 이사들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는 것이다. 소송대상에는 옵션계약 체결당시 ‘사실상의 이사’였던 정주영 전 명예회장과 정몽준 현대중공업 고문도 포함된다.

정부도 관련 대상들에게 형사책임을 묻기로 했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현대중공업의 옵션계약이나 현대증권과 전자의 각서 등이 모두 증권거래법과 금융감독규정 위반행위”라며 “사실관계와 고의성 여부를 조사해 혐의가 확인되는 대로 검찰에 고발하고 증권의 관련 임원들은 해임권고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금감원은 또 현대중공업과 외부감사를 맡은 회계법인에 대해서는 별도로 특별감리에 착수해 또다른 회계분식이 있는지도 조사하기로 했다. 정부의 이런 강경한 자세는 징계에만 목적을 두고 있는 게 아니다. 현대에 대한 시장의 불신을 제거하려면, 먼저 현대가 내세우고 있는 구조조정의 실적을 객관적으로 검증해야 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구조조정 실적 법적 검증해 관련자 처벌


(사진/현대의 어설픈 구조조정은 법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지난 7월28일 현대중공업 관계자들이 현대전자·증권을 상대로한 고소장을 서울지법에 내고 있다)


현대는 대우와 확실히 다르다. 1등을 차지하는 계열사가 하나도 없던 대우와는 달리, 현대는 조선 자동차 등 국내 여러 산업에서 확고한 1위를 차지하며 중추구실을 하는 계열사들이 있고 꾸준히 경상이익도 내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점차 닮은꼴이 커지고 있다는 데 있다.

대우는 몰락을 선언하기 직전인 99년 6월 서울힐튼호텔의 해외매각 성사를 발표했다. 룩셈부르크계 투자회사인 GMH에 2억1500억달러에 매각하기로 합의서를 교환한 것이다. 이를 두고 대우는 “구조조정 노력의 첫 가시적 성과”라고 자랑했으며, 시장에서도 계열사 주가가 일제히 오르는 등 긍정적인 반응이 나타났다. 김우중 회장도 힐튼호텔이 남의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구내식당에서 1600원짜리 점심을 사먹기도 했다. 그런데 이 계약은 해외매각이 아니라 힐튼호텔을 담보로 한 외화차입임이 며칠 가지 않아 드러났다. 5년 뒤에 계열사들이 이자를 듬뿍 쳐서 다시 되사주기로 한 이면계약을 채권은행들이 알아차린 것이다. 그뒤부터 대우가 아무리 그럴싸한 자구계획이나 실적을 내놓아도 시장에서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래서 몰락을 재촉했다.

계열사끼리 외화차입금 대납문제로 분쟁이 일자 UBS워버그증권은 현대중공업 투자의견을 ‘유보’에서 ‘매도’로 하향조정하면서, “이번 사례는 현대그룹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행위이며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숨겨진 위험(Black Hole)이 존재할지 모른다는 점을 인식시켜준다”고 지적했다.

현대 계열사들은 채권단과 주주들에게 약속한 구조조정 계획을 성실하게 이행하지 않았으며, 특히 과잉투자 업종 해소와 관련해서는 과감하게 처리하기보다는 부실을 숨기기에 급급하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예를 들어 올해 6월 말까지 계열분리하기로 했던 현대강관의 경우, 지난 1월 일본계 투자회사인 오테마치사에 1억5천만달러를 받고 지분 40%를 넘겼다고 했으나 지금은 다시 자동차 소그룹에 편입시키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이 오테마치사는 홍콩에 있는 ‘페이퍼컴퍼니’로 현대강관을 경영할 능력이 전혀 없어, 금융계에서는 대부분 현대 계열사들과 모종의 흥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지난 3월 금융감독원은 현대건설과 현대전자가 지난해 해외에서 발행한 전환사채와 신주인수권부사채 가운데 각각 2억8천만달러와 8천만달러어치를 사실상 모두 국내에서 소화시켰던 사실을 적발하기도 했다. 이런 편법 구조조정이 드러날 때마다 항상 그 중심고리에는 현대증권이 있었다. 이른바 그룹의 실세로 알려진 이익치 회장이 개입한 것이다.

등돌린 투자자, 무슨 말이 필요한가

현대그룹노동조합협의회 이천호 사무처장은 “지난 2년여 동안 합병과 매각, 외자유치로 구조조정을 했다고하지만 실제로는 시장의 압박을 피해가는 편법만 일삼아 결국 그룹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었다”며 “이런 와중에서도 총수 형제들은 재산권 싸움을 벌이고 가신경영자들이 이 틈을 이용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만 신경을 쓰고 있다”고 개탄을 했다.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은 지난 7월28일 임원회의를 소집해 이런 질문을 던졌다.

“나보고 자꾸 물러나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고 그 이유를 좀 말해달라.”

물론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이익치 회장이 정말 그 이유를 알고 싶다면 쉽게 알 수 있는 데가 있다. 바로 시장이다. 그 대답은 바닥을 헤매고 있는 그룹 계열사들의 주가, 가산금리를 듬뿍 더 얹어준다해도 아무도 사가려고 하지 않는 회사채와 기업어음, 그리고 “현대가 약속하는 것은 전혀 믿을 수 없다”는 투자자들의 냉담한 반응 등이 이익치 회장이 궁금해 하는 답변이다.

박순빈 기자sb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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